<너와 함께라면>은 상식과 진실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오해와 거짓이 반복되는 한나절의 악몽이다. 물론 이것은 당사자 입장에선 바라볼 경우이다. 아무 걱정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있어 이 해프닝은 단지 웃음의 향연이자 한 없이 고마운 희극의 한탕일 뿐이다. 타인의 최악의 날이 우리 생의 최고의 기쁨으로 돌아오는 멋진 악몽말이다. 모순과 곤경이 가장 좋은 희극의 반찬거리임을 생각해보면 28살 먹은 딸내미가 70대 노인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이건 참 좋은 웃음거리가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20대 아가씨가 백수도, 여자도 아닌 노인을 부모님께 소개시키는 순간부터 이야기와 웃음은 동시에 달리기 시작한다. 아. 인간이란,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불가한 구경거리인가.
인생을 살다보면 단순히 무엇인가를 쳐다보는 행위가 누군가와 동시대를 살아감에 경의를 표하고픈 감정으로 치환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된다. 이창동,쿠엔틴 타란티노와 함께 이런 진귀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이 중 하나가 바로 본 작품의 각본가인 미타니 코키이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일본 무대는 너무 좁고, 세계를 통틀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오해를 웃지못할 해프닝 위에 우스운 자태로 차곡 차곡 쌓아가는 일은, 그리고 뒤돌아 보면 그 모든 일들이 한결같은 집중력을 가졌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일은, 그가 최고임은 알고 있었다. 다중 캐릭터가 얽힌 희극 만큼은 그가 독보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볼때는 원초적 웃음보단 구조적 완성도나 인물간의 매끈한 관계에 더 눈이 갔다. 와. 그의 연극은 또다른 차원이었다. 더이상 최소화 할 수 없는 변환불가한 공간과 7인의 인물만으로 이야기의 완결성과 어마어마한 웃음, 그 모두를 잡아낸다. 두마리의 토끼 뿐 아니라, 두마리의 사자를 잡은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여유로히 한손으로 말이다.
거실과 마당을 오가는 7인 모두 훌륭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가 제역활을 다해준다. 자신의 자리에서 모두 빛난다. 그 중 아버지 역을 맡은 서현철씨는 유독 빛났다. 나머지 6인이 짜여진 틀 속에서 완벽히 제 위치를 찾아갔다면, 서현철씨는 한발 앞서 캐릭터를 자신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유연함과 능숙함을 보여준다. 기본적인 연기력을 떠나 역활이 제 몸에 딱 붙는 옷이었다. 대사의 늬앙스부터 시선처리와 리액션까지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는 관객에겐 즐거움이었다. 원체 빠른 속도로 몰아붙이는 작품이기에 작은 사건과 사건 사이를 잇는 자연스런 이음새가 중요했는데, 그 부분에 있어 서현철씨의 존재감은 한없이 부드러운 접착제였다. 대본에 적힌 대사와 배우가 뱉는 대사 사이에는 관객 반응의 간극이 존재한다. 아마도 7인의 배우중 그 사이를 가장 좁힌 사람이 서현철씨라 생각한다. 온전히 웃음에 초점이 맞춰진 한마당에서 그의 이런 재능은 놀랍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극의 전개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하나 마나다. 당신이 이 연극을 보든 안보든, 극의 신선함을 그릇치는 스포일러가 되거나, 몇일 후면 잊어버릴 의미없는 문장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작품은 희극으로서 무결점의 작품이란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진심을 다해 이를 추천하는 것 뿐. 인간이 가장 짧은 시간내에 얼마나 많은 웃음을 타의로 쏟아 낼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이 문장을 읽고 문뜩 그 빈도가 궁금해졌다면 주저없이 <너와 함께라면>을 감상할것을 추천한다. 120분이란 시간동안 100번의 미소와 200번의 박장대소가 가능한 마술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을 꼽자면 장내를 가득메운 먼지 한 톨 한 톨과 사소한 소리의 파동 그 어디에도 단점이라 칭할만한 헛점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이다. 왜냐? 재수 없지 않은가. 미타니 코키란 천재는. 아무리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봐도 관객의 몸 구석 구석을 훑고 지니가는건 웃음과 웃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