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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류승완의 <지구를 지켜라>에 보내는 열렬한 응원

2011. 4. 26. 02:57 Film Diary/Interview


2003.04.11

박찬욱-류승완, 이상한 감독 2人이 괴상한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 보내는 열렬한 응원


지난 3월 중순 <지구를 지켜라!> ‘VIP시사회’가 열리던 한 극장에는 유난히 열광적인 분위기의 한 무리가 눈길을 끌었다. 광란이라 할 만큼 뜨거운 반응을 보냈던 이들의 정체는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봉준호, 류승완 등 젊은 감독들. 이날 그들은 <지구를 지켜라!>의 기발한 세계에 취했고, 이어진 자리에서도 술과 대화에 취했다. 그중에도 유난히 목소리를 높였던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한 카페에서 만나 <지구를 지켜라!>에 관한 수다를 떨었다. 4월12일이면 <마루치 아라치>(가제)의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류 감독과 5월 초 <올드 보이> 촬영에 돌입하는 박 감독 모두 초 단위로 일정을 짜야할 정도인데도 시간을 내준 것. ‘동업자’로서의 연대의식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서였다.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예전 영화광 시절의 즐거움을 잠시나마 되찾았던 두 감독이 “이 영화를 응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찬욱 | (웃으면서)어 승완아, 소문에 <마루치 아라치>의 크랭크인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더라.

류승완 | 감독님, 제발 악소문 좀 내지 마세요. 아, <올드 보이>는 감독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박찬욱 | (웃음) 도대체 개봉이 언제야, 개봉이?

류승완 | 아직 개봉을 안 잡고 있어요, 일부러. CG 분량도 많고 스케일도 커서 개봉일을 미리 정해놓을 수가 없어요.

박찬욱 | 난 11월이거든. 알지?

류승완 | 아, 전 11월엔 죽었다 깨도 못해요. 저희는 8월 말 정도까지 촬영하는데 후반작업이 길어질 것 같아요.

박찬욱 | 후반작업 들어가면서 다음 작품 촬영에 들어가면 되겠네.

류승완 | 원하는 게 그건데. ‘류승완이 해냈다’,(웃음) 이런 좋은 소문을 내놓고 작품이 끝나기 전에 계약을 해서…. 계약만 하면 전쟁이 나도 되고….

박찬욱 | 전쟁, 그거 어떡하니?

류승완 | 아차, 감독님. 00당에 제 연락처 가르쳐주셨어요?

박찬욱 | 아니. (침묵)

류승완 | 거기서 감독님이 가르쳐줬다고 하던데요. 제가 촬영준비 때문에 낮엔 시간이 정말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 1인시위를 하라더군요.

박찬욱 | 거 참 이상한 애들이네. 내가 네 전화번호 가르쳐줬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류승완 | 아, 그렇죠. <지구를 지켜라!> 어떻게 보셨나요?

박찬욱 | 이창동 감독이 문화부 장관이 되는 걸 보고, 이젠 나도 영화 만들어 칭찬도 많이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당분간 영화 못 만드실 테니. 그런데 이런 영화가 나오고…. (한숨) 앞으로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도 나오지…. 올해도 틀렸구나…. (웃음) 그런 착잡한 마음이지. 산 넘어 산이구나, 하는. 허진호가 나보다 늦게 찍을 것 같아서 그나마 위안은 되는데, 어떡하냐 이제.

류승완 | (애써 정색하며) <선생 김봉두>가 잘돼야죠.(류승완 감독은 <선생 김봉두>의 제작사인 좋은영화에서 새 작품을 만든다) 저는 그거예요. (웃음)

박찬욱 | 좀 진지해지자. 나는 장르영화가 볼 때는 즐겁지만, 만들 땐 안 내키는 그런 갈등 속에서 지냈어. 내가 만든 영화가 완전히 장르에서 벗어난 게 아니면서도, 만들 때는 장르적으로 막 간다는 게 별 재미가 없어서 괴로워하던 참이라고. 근데 이 영화는 장르영화이면서도 장르를 갖고 놀다시피 하니까 그런 게 부럽기도 하고. 그런 감독이 한국에 필요한데, 기다리던 재능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이게 <선생 김봉두>에 비해 어떻다는 거야.

류승완 | 일단 <선생 김봉두>의 흥행이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웃음) 사실 저는 <선생 김봉두>를 재밌게 봤거든요. 영화의 완성도나 이런 걸 떠나서 만든 사람의 진심이 보여서 좋았어요. 같은 맥락에서 <지구를 지켜라!> 같은 경우는 주류에서 장르를 활용해 어떻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가, 이게 너무 잘 보이니까. 감독 개인의 얘기이기도 하고, 장르의 외피를 썼으면서 그거대로 가지 않기도 하고.

박찬욱 | 우리 제작실장은 팀 버튼보다 나은 재능이라고 그러던데. 팀 버튼이 없었다면 또 이런 영화도 안 나왔겠지만.

류승완 | 저는 장준환 감독 단편도 봤고, 함께 일해봤던 경험이 있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시나리오도 먼저 봤거든요. 그래선지 영화에서 만든 사람이 계속 보이더라구요. 그게 되게 좋았어요. 물론 개인을 모르고 그냥 영화를 봤을 때야 다르겠지만, ‘현장에서 저 사람 어디서 낄낄댔겠군’,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알겠군’, ‘저때 정말 자기가 무서워했겠군’, 뭐 이런 식이니까 재밌더라구요.

박찬욱 | 난 잘 모르는데도 재밌었어.

류승완 | 요샌 그렇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해도 뭔가 이렇게 덮게 되고….

박찬욱 | 장 감독은 잘 모르지만 난 (신)하균이를 보는 게 좋았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함께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 때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 거기서 말을 못하는 역할이었으니까. 자기 표현의 무기를 뺏어놓고 연기시키는 게 미안했는데, 여기서 적역을 맡아 날아다니는 걸 봤거든. 하여간 시사회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장준환, 허진호 감독, 뭐 이렇게 새벽 6시까지 술 마셨다니까. 근데 하균이는 중간에 도망가고. 그래서 하균이한테 문자 메시지 보냈어. 두나한테도 보내고.

류승완 | 아 감독님, 요즘에 문자도 보내세요?

박찬욱 | 그럼. ‘하균이 영화 끝내주더라’ 이렇게 보냈더니, 두나는 그때 촬영 중이더라구. 새벽 6시에. 근데 어떻게 걔는 금방 알더라. ‘아직도 술 드시나요’ 하고 답이 오더군. 문자에도 그런 게 보이냐? 혀 꼬부라지고 그런 게? 아, 내가 6시에 일어나서 뭘 했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하는 거지, 그지? (웃음)

류승완 | 새벽 6시에 문자는 잘 안 보내죠. (웃음)

박찬욱 | 특기할 만한 사항은 송강호 선수가 이 영화를 두번 봤다는 거야. 1년에 2편 보는 사람이. 올해 분량 다 채운 거야. (폭소)



류승완 | 이 영화에서 B급영화 정서가 흐른다는 말이 많은데, 제가 볼 때 장준환 감독은 참 특이해요. 감독 본인은 B급영화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쩌다 저랑 영화 얘기를 하다보면, 놀랍다는 눈을 하면서 그 느릿느릿한 말투로 ‘어 넌 어떻게 그 영화들을 다 봤니?’ 이런다고요. (웃음) 아무튼 그 영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가 그런 건데, 뭔가 아슬아슬한 지점이 있잖아요. 어느 쪽으로 좍 가는 게 아니라, 위태위태하게…. 그게 영화의 긴장이 돼서 몰아붙여요. 연기도 마찬가지에요. 이 사람이 영화광 출신이고, 그런 장르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설렁설렁한 연기에 중독돼 있었더라면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연기 연출하는 방식은 정공법이잖아요.

박찬욱 | 난 옛날 존 벨루시 시절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가 떠오르더라. 그때 이 TV쇼에 나오던 코미디언들은 다 마약중독자였단 말야. 그 미치광이, 마약중독자들이 나와서 미쳐버린다고. 이 영화엔 그런 무드가 있었어. 아주 좋았어. 그렇게 광기에 휩싸이는 영화가 한국에 별로 없었잖아.

류승완 | 저는 장 감독이 감수성에서 영향받은 지점이라면 B급영화로부터가 아니라 B급인생이 아닐까, 생각해요. 거기 나오는 폭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지운 감독님이 옛날에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고 나서 제 영화에 나오는 폭력이 되게 히스테리컬하다는 느낌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에 나오는 폭력도 여유가 없고, 광적이고….

박찬욱 | 너무 잔인하더라. 뒷부분에 연구소에서 백윤식씨가 하균이를 X나게 팰 때, 너무 무섭더라.

류승완 | 최근에 비교할 만한 영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물속에서 발목 끊고, 그러는. (<복수는 나의 것>을 극히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찬욱 |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더라.

류승완 | 그게 제 생각에는 약자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 같아요. 강자라면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게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거든요. 여기서 약자란 개인이 약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입장이나 그런 게 그런 편이란 거죠. 그리고 단편 <2001 이매진>하고 같은 연장선상에서 약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것도 느껴지거든요. 엄마에 대한 집착이나. 기본적으로 홀로서기가 잘 안 되는 인간에 대한 애정 같은 게 있어요.

박찬욱 | 그 인간이 그래?

류승완 |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박찬욱 | 너 삭제장면 아냐? 하균이가 굉장히 아쉬워하는 삭제장면이 있더라구. 추 형사를 추락사시키는 장면 있잖아. 그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가 빨랫줄에 널려 있는 마네킹 팔들을 죽 트래킹한대. 그런데 그 팔들이 흔들흔들하는 거야. 그리고 저 멀리서 하균이가 도끼질을 하고 있는 게 포커스아웃으로 비쳐지고. 그러니까 도끼질 진동에 흔들거리는 거야.

류승완 | 카아~.

박찬욱 | 아주 리드미컬하게. 그리고 트래킹의 마지막은 진짜 팔이지. 추 형사의 팔. 그게 참 좋았다더라구. 차승재 대표도 아주 잘 찍은 장면이었다 하고. 감독이 왔기에 그걸 왜 뺐냐구 그랬어. 너무 폭력적이어서 뺐다고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거다, 지금 남아 있는 데서도 훨씬 폭력적인 장면이 많다고. (웃음)

류승완 | 감독님, 근데 삭제장면이 걸작이란 얘기는…. 우리가 항상 쓰는 수법이잖아요. 정말 죽이는 장면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박찬욱 | 장준환 감독이 그 장면에 대해서 뭐라고 하냐면, “참 아름다운 커트였죠”. (웃음)


류승완 | 저는 <지구를 지켜라!>가 걸작이라기보다는 간만에 보는 에너지가 충만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다소 거친 CG장면들이 튀어나와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잖아요. 그 영화의 미덕이 거기인 것 같아요. 너무 세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너무 세서 좋은….

박찬욱 | 난 좋아. 형사들 나오는 게 좀 재미없었고, 나머지는 더 바랄 게 없어. 팀 버튼이 쓴 시나리오를 존 랜디스가 연출한 것 같아.

류승완 | 크으~.

박찬욱 | 특히 생각나는 장면이, 백윤식씨가 여자 옷 입고 환풍기 뜯고 도망가려다가 감전돼가지고…. (폭소) 엎어져서 울다가 웃다가 막 그러잖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송강호도 그러더라고. “저건 연기가 아니다. 실제로 백윤식씨가 ‘씨발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나. 내 인생 왜 이렇게 풀렸나’, 이러는 거”라고. (폭소) 난 거기가 백미였던 것 같아.

류승완 | 제가 꼽는 백미는 액션장면이죠. 약국에서 나와서 벌어지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장면이지만. (웃음)

박찬욱 | 내가 아쉬웠던 건 형사들 에피소드가 너무 길게 느껴지더라는 거야. 영화를 보다가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이제 산으로 가죠,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류승완 | 병구나 강 사장, 순이는 안에서 뭔가 분열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형사들은 딱 자기 역할만 있는 것 같아요. 서울대 나온 형사, 막 치고 올라가는 반장, 주방에서 일하는 추 형사 이렇게. 그러니까 역할만 있지, 캐릭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박찬욱 | 난 형사들보다는 순이를 좀더 보여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좀더 보고 싶더라. 병구와 헤어진 다음에 순이가 어떡하고 있는지, 순이가 서커스하는 장면이나 왜 순이는 병구와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아, 그런데 나는 백윤식씨가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너무 웃겨가지고…. (웃음) 그 아무 포인트가 아닌데도…. 대사가 없어도 돼. 아으으, 그러기만 해도 죽겠더라, 진짜.

류승완 | 배우도 배우지만, <지구를 지켜라!>에서 굉장히 좋았던 게 미술인 것 같아요. 그분이 우리 영화 미술감독(장근영)이기도 하죠. 음악도 굉장히 좋았어요. <오버 더 레인보우>를 계속 변주해서 쓰는 것도.

박찬욱 | 난 <오버 더 레인보우> 쓴 것은 좀 진부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어.

류승완 | 미술감독에게 들어보니 같이 콘티 작업을 했는데, 밝은 장면에서는 밝은 <오버 더 레인보우>, 어두운 장면에선 어두운 <오버 더 레인보우>, 빠른 장면에선 시끄러운 <오버 더 레인보우>, 이렇게 종류별로 틀어놓고 콘티를 그렸대요. 다른 인터뷰에선가 봤는데, ‘<오버 더 레인보우>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니냐’고 물으니까 장준환 감독이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대요. <오즈의 마법사>를 자세히 보고 있으면 주디 갤런드가 미쳐서 그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웃음)


박찬욱 | 그러니까 미친 병구와 잘 맞는다? 그래, 너무 잘 맞아서 재미없다는 얘기지. 그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 미쳤다고 볼 수도 있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도 이혜영, 전도연, 그리고 수십명 다 미쳤지.

류승완 |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게 정상적이진 않죠.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발목 끊고…. (웃음) 아, 감독님, <2001 이매진> 보셨나요? 이 영화가 그것과 되게 흡사해요. 캐릭터가 함몰되는 방식 같은 게. 주인공의 존재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언가에 영향받는다는 것도 그렇죠. <2001 이매진>에선 주인공이 존 레넌이라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아이콘에 필이 꽂히죠. 이 영화도 보면 거기서 농담같이 얘기하지만, 병구가 추 형사에게 “저도 이 책 안 만났으면 평생 화만 내고 살았을 거예요”라고 하잖아요. (웃음)

박찬욱 | (웃음) 그 대사 진짜 예술이야.

류승완 | 그렇죠? 어쨌든 병구가 완전히 산골에서 사니까 현대문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돌파구가 없으니까 그런 책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박찬욱 |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잖아. 대개 이런 영화에 그런 얘기가 들어갔을 때 거부감을 사기가 쉬운데 그런 건 전혀 없었어. 그런데 시사회에서 일부 젊은 관객은 병구의 과거가 나오자 ‘또 그런 거였어?’라고 했다는군.

류승완 | 실제로 제 동생 세대나 이렇게 보면 좀 다른 것 같아요. 아마도 내 또래 정도까지가 현실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박찬욱 | 그렇지. 요즘엔 시위를 해도 즐겁게 하니깐.

류승완 | 젊은 세대가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긴 하네요.

박찬욱 |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죽던데. 우리 회사 직원들도. 우리 회사 직원들은 <복수는 나의 것> 안 좋아하는 애들 많거든.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는 다 죽고 왔어. 결국 흥행이야 관객이 알아서 하는 거지만, 이 영화가 잘되면 우리야 편해지겠지. 이런 영화가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무래도 은퇴, 아니 퇴출 날짜를 좀 미룰 수 있겠지.




류승완 | 스코시즈가 <천국의 문> 사태가 끝나고 한 얘기 있잖아요. 더이상 큰 제작비로 개인적인 영화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뭐 이렇게. 저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은 영화가 일종의 기호식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박찬욱 | 이 영화에서 가장 기분 좋은 점은 웃음이 폭력과 붙어 있다는 거야. 그게 또 슬픔과 그렇게 결합돼가는 거 말이야.

류승완 | 일방적으로 웃어라 해서 웃는 게 아니라 좋은 거 같아요. 끊임없이 계속 웃을 사람 웃고, 놀랄 사람 놀라고. 무책임한 게 아니라 재밌는 연출 같아요. 이를테면 김지운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도 그런 게 있잖아요. 포크로 이마를 찔렀는데 웃어야 하는지 아닌지, 달려가다 아파트 문짝을 맞고 쓰러졌는데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박찬욱 | 내가 시나리오 쓰거나 콘티 작업할 때 사람들이 이건 너무 잔인해요, 라고 할 때 내가 항상 드는 예가 있어. <반칙왕>을 봐라. 거 뇌의 시점숏, 포크가 푹 들어오고. 근데 그거 흥행만 잘되지 않았냐. 그래서 나는 아직 멀었다고 그러지. <지구를 지켜라!>가 잘됐으면 하는 것도, <반칙왕>말고 예를 들 사례가 있으면 좋은 거지, 나는.

류승완 | 하긴, 이태리타월로 밀고 물파스를 바르니…. 우린 아직 멀었다.

박찬욱 | 백윤식씨가 “난 마취됐어, 아프지 않아”, 이러면서 못 박힌 손을 빼고. 오우~.

류승완 | 그러니까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하지만 영화로 즐길 수 있는,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영화적인 매력인 것 같아요. 너무 뻔하지 않게 가면서…. 그래서 상상력이라보다는 관점의 차이 같아요. 저는 이 영화가 상상력이 빛난다기보다는 아 참 골때리게 본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관점이 독특하다는. 말할 때 엄한 얘기 툭툭 던지는데 유쾌한 사람 있고, 짜증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장 감독이 전자 스타일이거든요. 영화가 그렇게 나와서 되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러면 웃기겠지, 식의 잔 계산 대신 그냥 딱 했는데 그게 웃겨 보이고. 즐겁고 슬프고.

박찬욱 | ‘이러면 웃기겠지’보다는 ‘이때 웃어도 할 수 없어’쪽이겠지.

류승완 | 관객이 포스터 문구를 보고 코미디 정도로 생각하고 본다면 ‘또 뭐야’, 이럴 수도 있는데, 그런 건 다 걷어버리고 극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냥 풀어놓고 보면 좋을 거예요. 분명 진심이 있는 영화잖아요.

박찬욱 | 근데 그날 차승재 대표의 반응은 실망스러웠어. 나하고 허진호하고 김지운, 류승완이 좋아했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그걸 비보로 받아들이더라고. 어쩌면 좋냐는 투로. 그런가 하면 최근에 김동주 대표 인터뷰에서는 곽경택하고 나하고 박기형하고 허진호 얘기를 하면서 최신작이 다 실패했던 감독들이라 반성하는 걸 기대한다고…. 한순간에 이렇게 되는구나…. (웃음) 잠깐이구나…. (웃음) 그렇게 생각했지.

류승완 | 그래도 감독님은 누가 얘기라도 해주죠. 저는 이제 얘기도 안 나와요. 영화나 찍어야지, 조용히.

박찬욱 | <지구를 지켜라!> 광고에 내 평도 실려 있잖아. 근데 그거 실패해봐. 투자자들이 날 또 어떻게 보겠냐고. 내 말을 인용해놓고 그때 가서 차승재 대표가 책임질 거냐고.

류승완 | 그러고보니 저도 이 대담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아, <시카고>에 붙을걸.
 

박찬욱 | 아무튼 내 영화도 앞두고 있는데, <지구를 지켜라!> 보고선 X됐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류승완 | 저는 남의 게 좋으면 가져다 쓰는 성격이라서, 뭐 별로…. 그냥 전화 한통 해주고 가져다 쓰는 편이라 그런 게 없어요. (웃음) 그런데 희한한 게 제가 한 건 표절이라고 하고, 장준환 감독님이 한 건 표절이 아니라고 하대요. 아니,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똑같이 해놓고, 오마주다, 이러고.

박찬욱 | (웃음) 솔직히 말해서 그 영화 보고 행복했어. 너무 유쾌하게 보고 6시까지 술 마시고.

류승완 | 어쨌든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은 좋지 않아요?

박찬욱 | 모처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영화를 만난 거고.

류승완 | 저는 시나리오 볼 때부터 잘됐으면 좋겠고 막 그랬는데, 내가 응원한 만큼 나와서 안심했어요. 나 이 영화 좋았어, 그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게 되게 고맙더라고요.

박찬욱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너도 바쁘지? 그럼 영화 열심히 만들자고.

류승완 | 네, 감독님. 그럼 저희도 <지구를 지켜라!>를 능가하는 주류 대중 흥행영화를 만들어야…. (웃음)



김지운, 이상한 감독 박찬욱을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논하다.

2011. 4. 22. 13:27 Film Diary/Interview



2002.04.06

한살 터울의 두 감독, 박찬욱과 김지운은 어딘지 닮았다. 체내에 흐르는 영화광의 피가 잡아당겨서 그런지 시사회나 회고전을 비롯해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서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우정의 가교”였다고 말하는 두 감독은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로 21세기 첫해의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화세계가 겹치는 교집합은 그간 만든 영화보다 그간 본 영화쪽에 훨씬 폭넓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두 감독이 만나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근사할 것이라는 발상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정 서로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해줄 수 있는 두 감독의 이야기는 엿듣는 즐거움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보였다.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나라면 두려워서 코미디로 피해가는 부분을 과감히 치고나간 영화”라며 박찬욱을 “늘 나보다 한두발 앞서 나가는 감독”이라 말한다. 송강호에게 코믹연기가 아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뽑아낸 것만 봐도 김지운의 이런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두 감독의 대화는 서로에게 장풍을 날리는 내공 겨루기가 아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남들이 못 보는 면을 샅샅이 뜯어본다. 때로 정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고 때로 아무도 눈치 못 채는 연출자의 진정한 성과를 추어올리면서 대화는 훌쩍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일단 글을 썼다 하면 기자, 평론가들이 펜을 꺾고 싶게 만드는 두 감독은 대담도 정말 멋지게 해치우려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떤 담화를 펼쳐야 근사하다고 소문날 것인가에 대한 은근한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김지운: 요즘 뭐 하고 사는지.

 

박찬욱: 개봉 전 막바지 인터뷰하면서 한동안 접하지 못했던 책 읽고 영화 보고 산다. <복수는 나의 것>이 메가히트가 되면 인터뷰 요청이 다시 쇄도하겠지만. (웃음) 인터뷰까지는 참는데 사진 포즈 취하는 게 고역이다.

 

김지운: 모 잡지에 실린 박 감독 사진 보니까 전날 밤 술 많이 했는지 눈이, 거의 한번 빼서 술에다 담갔다 다시 끼운 안구 같더라.

 

박찬욱: 배우들과 매일같이 술 많이 했다.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인터뷰어와도 좀 마시고. 요즘 본 영화 중에는 DVD로 본 <존 말코비치 되기>가 최고다.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막히더라. 서플먼트는 또 어떻고. 조수석에 앉은 기자가 질문하며 캠코더로 찍고 감독이 운전하면서 대답하는데, 상투적인 일련의 질문에 줄곧 메슥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아예 차를 세우고 마구 토하는 게 아닌가! 기자들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연출한 조크겠지만.

 

김지운: 나도 얼마 전 잉마르 베리만과 그의 오랜 동료였던 요셉슨이라는 사람의 대담을 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압권은 ‘평론가 폭행사건’에 관한 수다였는데, 베리만의 평론가에 대한 증오심이 <복수는 나의 것> 수준이더라. 내가 폭력을 가했지만 언어폭력도 신체에 가해진 폭력 이상의 상처가 된다면서. “우발적이었나?” 물으니 “아니, 철저히 준비했다”고 하고 “고인이 됐지만 그놈은 정말 죽일 놈이었다”고 못 박았다. (웃음) 당시 평론가협회에서는 회의를 하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베리만은 82살, 요셉슨은 77살인데 그 연배의 두 대가가 만나서 죽음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 하고 여자이야기만 30분 이상 낄낄거리면서 했다. 누군가 “두분이 만나면 자주 이러냐?”고 물으니까 “사실 그것밖에 할 게 없다. 우리 둘의 명랑함은 계속될 거다”고 말했다. 그 염세적인 ‘암울쟁이’가 말이다. 그 인터뷰를 보다 박 감독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잉마르 베리만이 아들한테 “내가 네게 나쁜 아버지라는 걸 인정한다”고 하니까 아들이 “나쁜 아버지조차 못 된다”고 빽 소리를 지르던데 당신은 좋은 아빠인가?

 

박찬욱: 많은 감독이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집에 오래 못 있고, 있어도 머리가 딴 데 가 있는 직업상 결함 탓이다. 그래서 “이건 집중력의 문제다” 생각하고 집에 있을 때만큼은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딸내미라(서우) 아빠를 따른다. 얼마 전엔 방학숙제한다고 해서 우리 둘이 조그만 동화를 하나 만들었다.

 

김지운: 박찬욱 감독 딸 서우는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 최고로 매력적이고 도도한 숙녀다. 그 카리스마는 실로 압도적이다. 영화야 물론 내가 한참 더 따라가야 하지만(박찬욱, 쿡 웃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영화 속에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박찬욱: 서우는 자기 아빠가 감독이라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 감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무척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나 좌중의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그러지 말라고 아빠 싫어한다고 몸을 날려서 막곤 한다.

 

김지운: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보배는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인물이다. 감독의 딸에 대한 감정이 들어간 부분일 거다.

 

박찬욱: 시나리오는 96년에 썼지만, 아빠가 된 뒤 만들기 잘 했다는 생각도 들더라. 특히 고만한 아이를 둔 내 또래의 아빠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신하균이 누나의 자살을 알게 될 때 보배가 <보노보노>를 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치마 들추는 장난하고 하균이 다리 포개면 보배가 올라타서 턱을 괴는 동작의 연출은 ‘애 아버지’가 만든 영화다운 순간이다. 내게 애가 없었다면 그저 건조하게 찍었겠지.

 

김지운: 6년 전 시나리오와 지금 영화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박찬욱: 범죄를 부추기기만 하는 작은 역이었던 영미의 비중이 캐스팅 이후 야금야금 커졌다. 그건 전적으로 배두나 책임이다.

 

김지운: 책임이라니?

 

박찬욱: 귀여우니까. 돈도 많이 줬으니까 본전 생각도 나고. (웃음) 엔딩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것도 뒤늦게 들어갔다. 그건 전적으로 봉준호 감독 책임이다. 고민하고 있는데 봉 감독이 나서서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술자리에서 송강호도 ‘전향’했다. 혹자는 남의 영화라서 그렇게 용감했을 거라고 하더라.

 

김지운: 어쨌거나 <복수는 나의 것>을 전작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휴머니즘과 웃음과 감동의 <…JSA >에서 180도 바뀌었다는 식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특이한 행보 아닐까.

 

박찬욱: 뭐, <배트맨> 만들던 사람이 <에드 우드> 찍는 거나, <위험한 관계> 만든 감독이 <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만든 거나, <크라잉 게임> 감독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찍은 거나. 나는 날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내 영화에 감독의 흔적이나 일관성이 없었으면 좋겠고 심지어 한 사람이 만든 영화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지운: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면 현실적 소재, 사회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다룰 때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은 점에서 영화의 장단점이 동시에 나온 것 같다. 그런 부정합이 박 감독이 원한 아우라였던 것도 같고. 이질적인 소재와 형식이 빚는 충돌 때문에 한번에 소화하기 힘들었다.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 내 계급대결 구도와 베트남전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룬 <택시 드라이버>를 몽환적으로 풀어서 잊지 못할 영화로 만들었는데, <복수는 나의 것> 역시 그런 종류의 강렬함이 있다. 이런 소재를 현실적 시각으로 풀 때 더 섬뜩할까, 스코시즈나 린치처럼 부조리한 악몽으로 풀었을 때 더 섬뜩할 것인가. 대중적으로는 전자가 답일 테고 소수 마니아는 후자에 열광할 것 같은데 <복수…>의 개봉결과가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복수…>를 박 감독의 상업적인 실험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박찬욱: 개봉을 앞두고 불안, 초조, 긴장…,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덤덤하지도 않다. 지금 심정은 호기심에 가깝다. 이런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일반 관객이 별점 주는 사이트에 갔더니 <복수…>는 다섯개 아니면 반개였다. 예전과 달리 리뷰, 홈페이지 게시판을 다 챙겨본다. 욕은 해도 좋은데 자꾸 전작과 비교해 배반이네 발전이네 반전이네 하는 건 불만이다. 다만 스타들이 이런 영화에 나와준 것은 내 영화가 아니라도 고무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이 수준의 영화를 다시 못 만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갖는 것도 이런 배우들이 이런 영화에 다시 모이기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계급대립의 관점에서 보는 평도 재밌게 봤다. 그런 의도도 명백히 있었고 운명론적 입장도 들어가 있다. 무정부주의 유물론자 테러리스트들이 신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하는 설정이 보여주듯 나는 순전히 모순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김지운: 그와 관련해 나는 <복수…>의 주요 캐릭터들이 우리나라에서 듣도 보도 생각도 못 했던, 생각하더라도 감히 실현시킬 수 없었던, 말하자면 어두운 열정의 소유자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그들은 온전한 삶의 대응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마니아들에게 천진한 구석이 있듯 정신적 순결성, 고결함이 훼손됐을 때 극단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박찬욱: 영미를 비롯해 그 인물들은 몹시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김지운: 그러니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아주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움직이는 결과가 된다. <복수…>에서 모든 리얼리티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평범한 사람인 나도 기존 질서를 지키며 살려고 하면서도 무서우리만치 적개심에 불타고 상상의 낭떠러지로 치달을 때가 많다. 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지만.

 

박찬욱: 운전중에 무섭다는 소리는 들었다.

 

김지운: 흠. 말하자면 삶에 서투른 거다. 배두나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도 순진하고, 송강호도 신하균도 누구 하나 순리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 이 세상 속에 같이 살고 있다. 불가해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또 하나의 축이 굴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재수가 없어서, 어떤 계기 때문에 그 금에 발이 걸린다. 예전에 교도소의 조직폭력배 순화교육하는 스님을 따라간 적이 있는데 중간보스와 화양리를 걷는 동안 15미터에 한명씩 200~300미터에 걸쳐 인사를 하더라. 어떤 끈을 잡으니까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 섬찍한 느낌을 안 그때부터 부조리도 리얼리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박찬욱: 실은 그런 것을 너무 의식해 데이비드 린치처럼 아예 다른 세계로 영화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김지운: 그래도 <복수…>에는 와이드를 쓴 양식적인 앵글이나 기괴한 조형감, 인물을 포진시키는 방법, 양식화된 캐릭터 설정 등등 현실을 악몽으로 치환시키는 일종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있다.

 

박찬욱: 사실 광각렌즈도 너무 감독을 내세우는 것 같아 피하려 했는데, 떨어져 있는 인물을 잡기 위해서는 심도가 필요한 나머지 불가피한 경우가 생기더라. 심도는 확보되지만 양식화된 느낌, 과장된 거리감이 생기니 고민이었다. 그런데 또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양식화된 화면이 싫지 않은 거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면서 내심 좋아했던 거겠지.

 

김지운: 장면묘사나 전개가 현실의 숨막히는 압박감을 전하면서도 매순간 이것은 어쨌든 유머라는 점을 자꾸 노출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밖에서는 방이 나뉘어져 있는데 카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거나. 알게 모르게 감독의 존재와 의도를 상기시키는 터치들이 보였다.

 

박찬욱: 스타일을 추구한 건 아니지만 잘 구도 잡힌 단정하고 엄숙한 화면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서 어떤 감독은 흐트러지고 꾸밈없는 앵글을 선호할 수도 있겠고 미학적으로 미결된 그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나 결국 지금처럼 해야 관객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김지운: 그점이 열광해야 할 지점인 것도 같고 말이 많아지는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교는 안 되지만 <조용한 가족> 할 때 고호경이 세트에 들어가면 벽이 보이고 다시 후진하면 벽이 없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다들 이해 못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기사님만 그러자고 해서 기뻐했는데 나중에 “뭐, 편집에서 자를 것도 있고 일단 다 찍어둬!” 하시더라. (웃음) 어쨌든 나는 폭력의 잔혹성, 박진감과 더불어 끊임없이 유머와 픽션의 징표를 노출하는, 그래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단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복수…>의 장악력이 좋았다.

 

박찬욱: 그게 바로 인터뷰의 곤란함이다. 예컨대 “소외효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치자. 나는 한 가닥의 실로 꿰어지는 전략이 싫고 설사 있다 해도 들키는 게 질색이다. 그런데 질문이 나오면 자꾸 한 가지로 대답해야 되니 멋이 없어진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처럼 대응하면 되지만, 보통사람이 그게 되나. 자꾸 성의있게 대답하고 싶어지는 걸 어떡하나.

 

김지운: 나도 감독 입장이 돼봐서 아는데 (웃음) 자기조차 궁금한 지점이 있다. 모르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의도도 없이 할 수도 있고, 마음속으로 이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가 거론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노출할 수는 없는 게 있다. 평론가들이 감독이 말하기 힘든 잠재의식을 짚어줘야 하는데. 표면에 드러난 걸 말하는 거야 누가 못하나.

 

박찬욱:그렇지. 내 입으로는 말 못 하지. 최근 누군가 <복수…>가 말이 없어진 이유는 내가 <…JSA > 이후 너무 많은 인터뷰를 해서가 아닌가라고 써서 철렁한 경험은 있다.

 

김지운: 그런데 영화를 만들면서 절제의 과잉이 있었다는 생각은 없는지? 오버액션만 과잉은 아니니까. 분명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잡았다는 느낌은 들지만, 나 역시 현장에서 절제하는 맛이 너무 좋은 나머지 풀지 못하고 갈 때가 있다.

 

박찬욱: 촬영이 끝난 시점에서는 오히려 “미니멀하게 가려 했는데 너무 감상적이 된 게 아닌가, 더 눌렀어야 하는데”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다 편집으로 솎아내고 나니까 충분히 건조했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지금 김 감독이 말한 것과는 반대다. 성격 탓인지 확 눌러간 테이크만 고르게 되더라. 예컨대 송강호가 마침내 신하균을 잡아 기절시켜 때리는 신에는 비통한 심정이 정점에 달해 거의 발광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토해내는 테이크도 있었다. 누구나 그것이 오케이라고 했다. 나와 송강호만 빼고. 물론 너무 건조한 것도 폼이니까 경계해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다.

 

김지운: 여담이지만 <복수…>에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 녹음하려고 1시간 반 차 타고 양수리 가서 2분 녹음하고 다시 1시간 반 차 타고 집에 왔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다음은 김지운 감독의 신작 <정말로 이상하다>의 주제곡 <정말로 이상하다>입니다.”라는 말 녹음하겠다고.

 

박찬욱: (미안한 듯) 믹싱할 때는 들리게 했는데 극장이 이상해서 그래.

 

김지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연기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영화에서는 표현된 적 없는 인물의 기이한 행태가 기주봉 선배를 비롯한 76극단 멤버들의 조연을 중심으로 많이 보인다. <어둠의 자식들> 끝내고 영화를 안 했던 기주봉 형을 <조용한 가족>에 불렀는데 처음부터 다른 배우와 달랐다. 세트장에 나타나자마자 “내가 나그네 입장에서 저 밑에서부터 그냥 올라와봤어.” 하는데, 예전 76극단 선배들과 의사소통하던 특이한 방식이 되살아나면서, 이런 형한테 내가 연기주문을 한다는 것이 무참했다. 전혀 통제가 안 되는 분들이다. 야외촬영장에 데려다놓으면 들로 산으로 꽃이나 꺾으러 다닐 사람들한테 무슨…. (웃음)

 

박찬욱: 76극단원들은 첫 테이크 돌아가면서부터 전 스탭이 긴장해야 한다. 언제 최고가 나올지 모르고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까. <복수…>에서 테러리스트로 분한 오광록이 뒤에서 송강호를 찌르는 연기는, 이런 말 미안하지만 전 출연진을 통틀어 최고의 순간이다.

 

김지운: 아마 이번 영화에서 송강호 연기가 잘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혼동되는 관객이 많을 거다. <복수…>에서 내가 생각하는 송강호 연기의 백미는 이거다. 송강호가 형사와 봉고차 안에서 온갖 비장감에 충만한 상태로 ‘아우라’를 관장하며 이야기하는 장면 있지 않나. 그런데 이 형사가 차에서 막 나가 전화를 받으면서 김을 빼는 거다. 그때 송강호가 “아이, 씨발” 하면서 걸어나오는 연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거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송강호가 고양된 상태로 형사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형사가 분위기를 깰 때 그의 판타지는 무너진 거다.

 

박찬욱: 자세가 안 나오는 거지.

 

김지운: 폼은 잡는데 밋밋하다는 느낌이 관객에게 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송강호는 속으로 온 우주의 절망을 다 안고 가는 건데.

 

박찬욱: 알고보면 자세가 망가진 사람의 좌절인 거지. 난 송강호가 최 반장을 매수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여기서 송강호는 딸의 유령을 만난 직후다. 그는 뭔가 달라진 거듭난 사람이라는 느낌, 정말 밥맛 없는 부자라는 느낌을 풍긴다.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서 헛기침하는데 그 부분이 정말 송강호답다.

 

김지운: 배두나를 린치하고 숨을 고르면서 머리 넘기는 장면을 보자. 실제로 아마 그 상황과 입장에서는 그 동작 외에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송강호 연기는 사실 그런 각도에서 논의돼야 한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생략되는 시간의 리얼리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조하게 표현하는 능력 말이다. 신하균, 배두나, 오광록, 기주봉 등의 연기는 짐승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짜 에너지를 느꼈던 영화는 드물었다.

 

박찬욱: 나는 아무래도 “이 영화를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가 아니라 “이 인물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에 가까운 감독인 것 같다. 예컨대 송강호가 테러리스트를 만나기 전에 어떤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고 그 과정에도 많은 번뇌가 있었지만 일단 끝난 이상 자수성가한 자본가로 다시 사업을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잘못 걸렸다고 끊는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새출발의 순간에 결국 돌연히 ‘끝’이 찾아오니 억울해서 웅얼거리고 갸웃거린 것이 아닐까.

 

김지운: 하나의 공간에 신하균의 죽은 누나가 묻히고 송강호의 딸이 죽고 결국 그 자리에서 신하균도 송강호도 죽는다. 그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나.

 

박찬욱: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반대의 지점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하고 싶었다.

 

김지운: 그런데 문제의 강변은 극중 인물의 비밀이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오픈된 장소다.

 

박찬욱: 대낮의 야외공간, 적나라하고 가혹한 일광이 꼭 필요했다.

 

김지운: 어려서 산과 계곡을 많이 쏘다녔는데 은폐돼 있고 비밀스럽고 음습한 공간에서 어두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탁 터진 공간에서 오히려 다 벗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툭 터진 장소에 사람을 끌고와 죽이는 것이 어둠 속의 살인보다 훨씬 안심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욕망의 발현이랄까.

 

박찬욱: 영화 속 죽음의 강가는 한국의 소박하고 평범한 산하이며 신하균 남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자연에는 어머니 품 같고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것은 가장 가혹한 존재이기도 하다. 완전노출 상태의 적나라한 가혹함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였다.

 

김지운: <조용한 가족> 시나리오 원본에는, 가족들이 시체를 푸대에 넣어 묻는데 노인 한 사람이 계속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설정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주 은밀한 행위를 그 노인은 멀쩡히 내려다보고 있는 거다.

 

박찬욱: 여기선 신하균이 그런 존재다. 송강호가 누나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에도 둑 위로 트럭이 한대 지나간다. 그 설정을 고집한 것은 이곳이 오지도 아니고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이란 느낌을 주고 싶어서였다. 어릴 적 시골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어른들은 어린 나를 겁주려했는지 농촌에는 알고보면 밭고랑 같은 곳에 시체가 많이 묻혀 있다고, 사람이 드문드문 사는 이런 곳에서는 죽여서 가까운 데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김지운: 캐릭터에서 재미있는 점은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저렇게 참담한 사건을 맞이하면 저런 식으로 나가겠구나 싶었던 거다. 거울 앞에서 혼자 팔굽혀펴기를 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자신이 사회에서 이질적 존재로 느껴질 때의 쾌감에서 나오는 자가발전 같은 게 분명히 있다. 배두나가 도심에서 미제축출을 외칠 때, 신하균이 장기밀매단에 복수를 하러 갈 때 그들은 영혼이 구제받는 순간이라고 느낄 거다.

 

박찬욱: 송강호가 신하균을 잡았을 때도 그렇다. 신하균을 방 한가운데로 끌어놓고 문을 닿고 숨을 고르고 돌아서서 내려다볼 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 받았을 때와 같은-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혹감을 느끼는 거다.

 

김지운: 이 소재에 적합한 더 사실적이거나 안정적인 방식이 있었을 것도 같다. 그랬으면 영화가 훨씬 더 높이 평가받고 대중적인 장도 더 크게 확보했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든다.

 

박찬욱: 그러면 더 나쁜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됐을 거다. 아마도 ‘정글’ 같은 느낌이 더 살았을 것이고. 그러나 일부러 그런 스타일을 택했다면 내 정체성을 배반하는 일일 것 같았다. 형식주의자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스타일이 ‘출구없음’의 느낌을 더 강하게 전할 거라고 판단했다.

 

김지운: 하긴 그런 길을 택했다면 박찬욱 감독 영화는 다 봤다는 느낌이었을 거다.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박찬욱: 아, 감독은 부디 잊어달라니까. 난 훗날 영화사가가 내 영화의 일관성을 논하는 것보다, 이러이러한 영화들을 보다보니, 공통점은 감독이 같은 사람이라는 점뿐이더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김지운: 우리 영화산업의 인프라가 4, 5년 전보다 비대해지고 매체도 많아지면서 감독들도 모르게 덩달아 조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뭐든 빨리 표현하고 노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중예술이건 고급예술이건 간에, 인생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새 스타일을 찾아내기도 하고 끝없이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 또한 영화를 보면서 신속히 결론을 내고 정리하고 싶은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욕구를 거역하게 해주고 반성하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복수…>를 보는 일은 즐거웠다.

 

이창동 감독 <시> 관련 인터뷰 중 - 영화란...

2011. 4. 7. 17:53 Film Diary/Interview



2010년 6월 3,4 양일간 박혜진이 만난 사람들에 출연하신 이창동 감독님의 인터뷰중 일부입니다. <시>의 메세지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된 이 짧은 대화는 비단 <시>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진정한 씨네아스트인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시각과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 같아 올려봅니다. 예술과 오락의 경계에서 끈임없이 흔들리고 고뇌하는 영화란 존재. 그것을 만드는 이의 고민과 수용하는 이의 선택에 있어 꽤나 큰 조언이 될것같습니다. 영화를 감상한 후 언제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마음 깊숙한 곳에 아로 새겨주는 그의 영화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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