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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이상한 감독 박찬욱을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논하다.

2011. 4. 22. 13:27 Film Diary/Interview



2002.04.06

한살 터울의 두 감독, 박찬욱과 김지운은 어딘지 닮았다. 체내에 흐르는 영화광의 피가 잡아당겨서 그런지 시사회나 회고전을 비롯해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서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우정의 가교”였다고 말하는 두 감독은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로 21세기 첫해의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화세계가 겹치는 교집합은 그간 만든 영화보다 그간 본 영화쪽에 훨씬 폭넓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두 감독이 만나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근사할 것이라는 발상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정 서로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해줄 수 있는 두 감독의 이야기는 엿듣는 즐거움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보였다.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나라면 두려워서 코미디로 피해가는 부분을 과감히 치고나간 영화”라며 박찬욱을 “늘 나보다 한두발 앞서 나가는 감독”이라 말한다. 송강호에게 코믹연기가 아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뽑아낸 것만 봐도 김지운의 이런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두 감독의 대화는 서로에게 장풍을 날리는 내공 겨루기가 아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김지운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남들이 못 보는 면을 샅샅이 뜯어본다. 때로 정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고 때로 아무도 눈치 못 채는 연출자의 진정한 성과를 추어올리면서 대화는 훌쩍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일단 글을 썼다 하면 기자, 평론가들이 펜을 꺾고 싶게 만드는 두 감독은 대담도 정말 멋지게 해치우려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떤 담화를 펼쳐야 근사하다고 소문날 것인가에 대한 은근한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김지운: 요즘 뭐 하고 사는지.

 

박찬욱: 개봉 전 막바지 인터뷰하면서 한동안 접하지 못했던 책 읽고 영화 보고 산다. <복수는 나의 것>이 메가히트가 되면 인터뷰 요청이 다시 쇄도하겠지만. (웃음) 인터뷰까지는 참는데 사진 포즈 취하는 게 고역이다.

 

김지운: 모 잡지에 실린 박 감독 사진 보니까 전날 밤 술 많이 했는지 눈이, 거의 한번 빼서 술에다 담갔다 다시 끼운 안구 같더라.

 

박찬욱: 배우들과 매일같이 술 많이 했다.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인터뷰어와도 좀 마시고. 요즘 본 영화 중에는 DVD로 본 <존 말코비치 되기>가 최고다.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막히더라. 서플먼트는 또 어떻고. 조수석에 앉은 기자가 질문하며 캠코더로 찍고 감독이 운전하면서 대답하는데, 상투적인 일련의 질문에 줄곧 메슥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아예 차를 세우고 마구 토하는 게 아닌가! 기자들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연출한 조크겠지만.

 

김지운: 나도 얼마 전 잉마르 베리만과 그의 오랜 동료였던 요셉슨이라는 사람의 대담을 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압권은 ‘평론가 폭행사건’에 관한 수다였는데, 베리만의 평론가에 대한 증오심이 <복수는 나의 것> 수준이더라. 내가 폭력을 가했지만 언어폭력도 신체에 가해진 폭력 이상의 상처가 된다면서. “우발적이었나?” 물으니 “아니, 철저히 준비했다”고 하고 “고인이 됐지만 그놈은 정말 죽일 놈이었다”고 못 박았다. (웃음) 당시 평론가협회에서는 회의를 하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베리만은 82살, 요셉슨은 77살인데 그 연배의 두 대가가 만나서 죽음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 하고 여자이야기만 30분 이상 낄낄거리면서 했다. 누군가 “두분이 만나면 자주 이러냐?”고 물으니까 “사실 그것밖에 할 게 없다. 우리 둘의 명랑함은 계속될 거다”고 말했다. 그 염세적인 ‘암울쟁이’가 말이다. 그 인터뷰를 보다 박 감독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잉마르 베리만이 아들한테 “내가 네게 나쁜 아버지라는 걸 인정한다”고 하니까 아들이 “나쁜 아버지조차 못 된다”고 빽 소리를 지르던데 당신은 좋은 아빠인가?

 

박찬욱: 많은 감독이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집에 오래 못 있고, 있어도 머리가 딴 데 가 있는 직업상 결함 탓이다. 그래서 “이건 집중력의 문제다” 생각하고 집에 있을 때만큼은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딸내미라(서우) 아빠를 따른다. 얼마 전엔 방학숙제한다고 해서 우리 둘이 조그만 동화를 하나 만들었다.

 

김지운: 박찬욱 감독 딸 서우는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 최고로 매력적이고 도도한 숙녀다. 그 카리스마는 실로 압도적이다. 영화야 물론 내가 한참 더 따라가야 하지만(박찬욱, 쿡 웃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영화 속에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박찬욱: 서우는 자기 아빠가 감독이라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 감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무척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나 좌중의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그러지 말라고 아빠 싫어한다고 몸을 날려서 막곤 한다.

 

김지운: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보배는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인물이다. 감독의 딸에 대한 감정이 들어간 부분일 거다.

 

박찬욱: 시나리오는 96년에 썼지만, 아빠가 된 뒤 만들기 잘 했다는 생각도 들더라. 특히 고만한 아이를 둔 내 또래의 아빠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신하균이 누나의 자살을 알게 될 때 보배가 <보노보노>를 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치마 들추는 장난하고 하균이 다리 포개면 보배가 올라타서 턱을 괴는 동작의 연출은 ‘애 아버지’가 만든 영화다운 순간이다. 내게 애가 없었다면 그저 건조하게 찍었겠지.

 

김지운: 6년 전 시나리오와 지금 영화가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박찬욱: 범죄를 부추기기만 하는 작은 역이었던 영미의 비중이 캐스팅 이후 야금야금 커졌다. 그건 전적으로 배두나 책임이다.

 

김지운: 책임이라니?

 

박찬욱: 귀여우니까. 돈도 많이 줬으니까 본전 생각도 나고. (웃음) 엔딩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것도 뒤늦게 들어갔다. 그건 전적으로 봉준호 감독 책임이다. 고민하고 있는데 봉 감독이 나서서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술자리에서 송강호도 ‘전향’했다. 혹자는 남의 영화라서 그렇게 용감했을 거라고 하더라.

 

김지운: 어쨌거나 <복수는 나의 것>을 전작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휴머니즘과 웃음과 감동의 <…JSA >에서 180도 바뀌었다는 식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특이한 행보 아닐까.

 

박찬욱: 뭐, <배트맨> 만들던 사람이 <에드 우드> 찍는 거나, <위험한 관계> 만든 감독이 <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만든 거나, <크라잉 게임> 감독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찍은 거나. 나는 날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내 영화에 감독의 흔적이나 일관성이 없었으면 좋겠고 심지어 한 사람이 만든 영화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지운: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면 현실적 소재, 사회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다룰 때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은 점에서 영화의 장단점이 동시에 나온 것 같다. 그런 부정합이 박 감독이 원한 아우라였던 것도 같고. 이질적인 소재와 형식이 빚는 충돌 때문에 한번에 소화하기 힘들었다.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 내 계급대결 구도와 베트남전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룬 <택시 드라이버>를 몽환적으로 풀어서 잊지 못할 영화로 만들었는데, <복수는 나의 것> 역시 그런 종류의 강렬함이 있다. 이런 소재를 현실적 시각으로 풀 때 더 섬뜩할까, 스코시즈나 린치처럼 부조리한 악몽으로 풀었을 때 더 섬뜩할 것인가. 대중적으로는 전자가 답일 테고 소수 마니아는 후자에 열광할 것 같은데 <복수…>의 개봉결과가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복수…>를 박 감독의 상업적인 실험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박찬욱: 개봉을 앞두고 불안, 초조, 긴장…,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덤덤하지도 않다. 지금 심정은 호기심에 가깝다. 이런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일반 관객이 별점 주는 사이트에 갔더니 <복수…>는 다섯개 아니면 반개였다. 예전과 달리 리뷰, 홈페이지 게시판을 다 챙겨본다. 욕은 해도 좋은데 자꾸 전작과 비교해 배반이네 발전이네 반전이네 하는 건 불만이다. 다만 스타들이 이런 영화에 나와준 것은 내 영화가 아니라도 고무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이 수준의 영화를 다시 못 만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갖는 것도 이런 배우들이 이런 영화에 다시 모이기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계급대립의 관점에서 보는 평도 재밌게 봤다. 그런 의도도 명백히 있었고 운명론적 입장도 들어가 있다. 무정부주의 유물론자 테러리스트들이 신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하는 설정이 보여주듯 나는 순전히 모순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김지운: 그와 관련해 나는 <복수…>의 주요 캐릭터들이 우리나라에서 듣도 보도 생각도 못 했던, 생각하더라도 감히 실현시킬 수 없었던, 말하자면 어두운 열정의 소유자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그들은 온전한 삶의 대응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마니아들에게 천진한 구석이 있듯 정신적 순결성, 고결함이 훼손됐을 때 극단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박찬욱: 영미를 비롯해 그 인물들은 몹시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김지운: 그러니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아주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움직이는 결과가 된다. <복수…>에서 모든 리얼리티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평범한 사람인 나도 기존 질서를 지키며 살려고 하면서도 무서우리만치 적개심에 불타고 상상의 낭떠러지로 치달을 때가 많다. 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지만.

 

박찬욱: 운전중에 무섭다는 소리는 들었다.

 

김지운: 흠. 말하자면 삶에 서투른 거다. 배두나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도 순진하고, 송강호도 신하균도 누구 하나 순리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 이 세상 속에 같이 살고 있다. 불가해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또 하나의 축이 굴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재수가 없어서, 어떤 계기 때문에 그 금에 발이 걸린다. 예전에 교도소의 조직폭력배 순화교육하는 스님을 따라간 적이 있는데 중간보스와 화양리를 걷는 동안 15미터에 한명씩 200~300미터에 걸쳐 인사를 하더라. 어떤 끈을 잡으니까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 섬찍한 느낌을 안 그때부터 부조리도 리얼리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박찬욱: 실은 그런 것을 너무 의식해 데이비드 린치처럼 아예 다른 세계로 영화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김지운: 그래도 <복수…>에는 와이드를 쓴 양식적인 앵글이나 기괴한 조형감, 인물을 포진시키는 방법, 양식화된 캐릭터 설정 등등 현실을 악몽으로 치환시키는 일종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있다.

 

박찬욱: 사실 광각렌즈도 너무 감독을 내세우는 것 같아 피하려 했는데, 떨어져 있는 인물을 잡기 위해서는 심도가 필요한 나머지 불가피한 경우가 생기더라. 심도는 확보되지만 양식화된 느낌, 과장된 거리감이 생기니 고민이었다. 그런데 또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양식화된 화면이 싫지 않은 거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면서 내심 좋아했던 거겠지.

 

김지운: 장면묘사나 전개가 현실의 숨막히는 압박감을 전하면서도 매순간 이것은 어쨌든 유머라는 점을 자꾸 노출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밖에서는 방이 나뉘어져 있는데 카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거나. 알게 모르게 감독의 존재와 의도를 상기시키는 터치들이 보였다.

 

박찬욱: 스타일을 추구한 건 아니지만 잘 구도 잡힌 단정하고 엄숙한 화면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서 어떤 감독은 흐트러지고 꾸밈없는 앵글을 선호할 수도 있겠고 미학적으로 미결된 그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나 결국 지금처럼 해야 관객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김지운: 그점이 열광해야 할 지점인 것도 같고 말이 많아지는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교는 안 되지만 <조용한 가족> 할 때 고호경이 세트에 들어가면 벽이 보이고 다시 후진하면 벽이 없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다들 이해 못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기사님만 그러자고 해서 기뻐했는데 나중에 “뭐, 편집에서 자를 것도 있고 일단 다 찍어둬!” 하시더라. (웃음) 어쨌든 나는 폭력의 잔혹성, 박진감과 더불어 끊임없이 유머와 픽션의 징표를 노출하는, 그래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단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복수…>의 장악력이 좋았다.

 

박찬욱: 그게 바로 인터뷰의 곤란함이다. 예컨대 “소외효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치자. 나는 한 가닥의 실로 꿰어지는 전략이 싫고 설사 있다 해도 들키는 게 질색이다. 그런데 질문이 나오면 자꾸 한 가지로 대답해야 되니 멋이 없어진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처럼 대응하면 되지만, 보통사람이 그게 되나. 자꾸 성의있게 대답하고 싶어지는 걸 어떡하나.

 

김지운: 나도 감독 입장이 돼봐서 아는데 (웃음) 자기조차 궁금한 지점이 있다. 모르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의도도 없이 할 수도 있고, 마음속으로 이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가 거론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노출할 수는 없는 게 있다. 평론가들이 감독이 말하기 힘든 잠재의식을 짚어줘야 하는데. 표면에 드러난 걸 말하는 거야 누가 못하나.

 

박찬욱:그렇지. 내 입으로는 말 못 하지. 최근 누군가 <복수…>가 말이 없어진 이유는 내가 <…JSA > 이후 너무 많은 인터뷰를 해서가 아닌가라고 써서 철렁한 경험은 있다.

 

김지운: 그런데 영화를 만들면서 절제의 과잉이 있었다는 생각은 없는지? 오버액션만 과잉은 아니니까. 분명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잡았다는 느낌은 들지만, 나 역시 현장에서 절제하는 맛이 너무 좋은 나머지 풀지 못하고 갈 때가 있다.

 

박찬욱: 촬영이 끝난 시점에서는 오히려 “미니멀하게 가려 했는데 너무 감상적이 된 게 아닌가, 더 눌렀어야 하는데”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다 편집으로 솎아내고 나니까 충분히 건조했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지금 김 감독이 말한 것과는 반대다. 성격 탓인지 확 눌러간 테이크만 고르게 되더라. 예컨대 송강호가 마침내 신하균을 잡아 기절시켜 때리는 신에는 비통한 심정이 정점에 달해 거의 발광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토해내는 테이크도 있었다. 누구나 그것이 오케이라고 했다. 나와 송강호만 빼고. 물론 너무 건조한 것도 폼이니까 경계해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다.

 

김지운: 여담이지만 <복수…>에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 녹음하려고 1시간 반 차 타고 양수리 가서 2분 녹음하고 다시 1시간 반 차 타고 집에 왔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다음은 김지운 감독의 신작 <정말로 이상하다>의 주제곡 <정말로 이상하다>입니다.”라는 말 녹음하겠다고.

 

박찬욱: (미안한 듯) 믹싱할 때는 들리게 했는데 극장이 이상해서 그래.

 

김지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연기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영화에서는 표현된 적 없는 인물의 기이한 행태가 기주봉 선배를 비롯한 76극단 멤버들의 조연을 중심으로 많이 보인다. <어둠의 자식들> 끝내고 영화를 안 했던 기주봉 형을 <조용한 가족>에 불렀는데 처음부터 다른 배우와 달랐다. 세트장에 나타나자마자 “내가 나그네 입장에서 저 밑에서부터 그냥 올라와봤어.” 하는데, 예전 76극단 선배들과 의사소통하던 특이한 방식이 되살아나면서, 이런 형한테 내가 연기주문을 한다는 것이 무참했다. 전혀 통제가 안 되는 분들이다. 야외촬영장에 데려다놓으면 들로 산으로 꽃이나 꺾으러 다닐 사람들한테 무슨…. (웃음)

 

박찬욱: 76극단원들은 첫 테이크 돌아가면서부터 전 스탭이 긴장해야 한다. 언제 최고가 나올지 모르고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까. <복수…>에서 테러리스트로 분한 오광록이 뒤에서 송강호를 찌르는 연기는, 이런 말 미안하지만 전 출연진을 통틀어 최고의 순간이다.

 

김지운: 아마 이번 영화에서 송강호 연기가 잘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혼동되는 관객이 많을 거다. <복수…>에서 내가 생각하는 송강호 연기의 백미는 이거다. 송강호가 형사와 봉고차 안에서 온갖 비장감에 충만한 상태로 ‘아우라’를 관장하며 이야기하는 장면 있지 않나. 그런데 이 형사가 차에서 막 나가 전화를 받으면서 김을 빼는 거다. 그때 송강호가 “아이, 씨발” 하면서 걸어나오는 연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거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송강호가 고양된 상태로 형사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형사가 분위기를 깰 때 그의 판타지는 무너진 거다.

 

박찬욱: 자세가 안 나오는 거지.

 

김지운: 폼은 잡는데 밋밋하다는 느낌이 관객에게 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송강호는 속으로 온 우주의 절망을 다 안고 가는 건데.

 

박찬욱: 알고보면 자세가 망가진 사람의 좌절인 거지. 난 송강호가 최 반장을 매수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여기서 송강호는 딸의 유령을 만난 직후다. 그는 뭔가 달라진 거듭난 사람이라는 느낌, 정말 밥맛 없는 부자라는 느낌을 풍긴다.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서 헛기침하는데 그 부분이 정말 송강호답다.

 

김지운: 배두나를 린치하고 숨을 고르면서 머리 넘기는 장면을 보자. 실제로 아마 그 상황과 입장에서는 그 동작 외에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송강호 연기는 사실 그런 각도에서 논의돼야 한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생략되는 시간의 리얼리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조하게 표현하는 능력 말이다. 신하균, 배두나, 오광록, 기주봉 등의 연기는 짐승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짜 에너지를 느꼈던 영화는 드물었다.

 

박찬욱: 나는 아무래도 “이 영화를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가 아니라 “이 인물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에 가까운 감독인 것 같다. 예컨대 송강호가 테러리스트를 만나기 전에 어떤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고 그 과정에도 많은 번뇌가 있었지만 일단 끝난 이상 자수성가한 자본가로 다시 사업을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잘못 걸렸다고 끊는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새출발의 순간에 결국 돌연히 ‘끝’이 찾아오니 억울해서 웅얼거리고 갸웃거린 것이 아닐까.

 

김지운: 하나의 공간에 신하균의 죽은 누나가 묻히고 송강호의 딸이 죽고 결국 그 자리에서 신하균도 송강호도 죽는다. 그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나.

 

박찬욱: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반대의 지점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하고 싶었다.

 

김지운: 그런데 문제의 강변은 극중 인물의 비밀이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오픈된 장소다.

 

박찬욱: 대낮의 야외공간, 적나라하고 가혹한 일광이 꼭 필요했다.

 

김지운: 어려서 산과 계곡을 많이 쏘다녔는데 은폐돼 있고 비밀스럽고 음습한 공간에서 어두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탁 터진 공간에서 오히려 다 벗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툭 터진 장소에 사람을 끌고와 죽이는 것이 어둠 속의 살인보다 훨씬 안심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욕망의 발현이랄까.

 

박찬욱: 영화 속 죽음의 강가는 한국의 소박하고 평범한 산하이며 신하균 남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자연에는 어머니 품 같고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것은 가장 가혹한 존재이기도 하다. 완전노출 상태의 적나라한 가혹함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였다.

 

김지운: <조용한 가족> 시나리오 원본에는, 가족들이 시체를 푸대에 넣어 묻는데 노인 한 사람이 계속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설정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주 은밀한 행위를 그 노인은 멀쩡히 내려다보고 있는 거다.

 

박찬욱: 여기선 신하균이 그런 존재다. 송강호가 누나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에도 둑 위로 트럭이 한대 지나간다. 그 설정을 고집한 것은 이곳이 오지도 아니고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이란 느낌을 주고 싶어서였다. 어릴 적 시골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어른들은 어린 나를 겁주려했는지 농촌에는 알고보면 밭고랑 같은 곳에 시체가 많이 묻혀 있다고, 사람이 드문드문 사는 이런 곳에서는 죽여서 가까운 데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김지운: 캐릭터에서 재미있는 점은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저렇게 참담한 사건을 맞이하면 저런 식으로 나가겠구나 싶었던 거다. 거울 앞에서 혼자 팔굽혀펴기를 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자신이 사회에서 이질적 존재로 느껴질 때의 쾌감에서 나오는 자가발전 같은 게 분명히 있다. 배두나가 도심에서 미제축출을 외칠 때, 신하균이 장기밀매단에 복수를 하러 갈 때 그들은 영혼이 구제받는 순간이라고 느낄 거다.

 

박찬욱: 송강호가 신하균을 잡았을 때도 그렇다. 신하균을 방 한가운데로 끌어놓고 문을 닿고 숨을 고르고 돌아서서 내려다볼 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 받았을 때와 같은-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혹감을 느끼는 거다.

 

김지운: 이 소재에 적합한 더 사실적이거나 안정적인 방식이 있었을 것도 같다. 그랬으면 영화가 훨씬 더 높이 평가받고 대중적인 장도 더 크게 확보했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든다.

 

박찬욱: 그러면 더 나쁜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됐을 거다. 아마도 ‘정글’ 같은 느낌이 더 살았을 것이고. 그러나 일부러 그런 스타일을 택했다면 내 정체성을 배반하는 일일 것 같았다. 형식주의자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스타일이 ‘출구없음’의 느낌을 더 강하게 전할 거라고 판단했다.

 

김지운: 하긴 그런 길을 택했다면 박찬욱 감독 영화는 다 봤다는 느낌이었을 거다.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박찬욱: 아, 감독은 부디 잊어달라니까. 난 훗날 영화사가가 내 영화의 일관성을 논하는 것보다, 이러이러한 영화들을 보다보니, 공통점은 감독이 같은 사람이라는 점뿐이더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김지운: 우리 영화산업의 인프라가 4, 5년 전보다 비대해지고 매체도 많아지면서 감독들도 모르게 덩달아 조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뭐든 빨리 표현하고 노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중예술이건 고급예술이건 간에, 인생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새 스타일을 찾아내기도 하고 끝없이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 또한 영화를 보면서 신속히 결론을 내고 정리하고 싶은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욕구를 거역하게 해주고 반성하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복수…>를 보는 일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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