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11
박찬욱-류승완, 이상한 감독 2人이 괴상한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 보내는 열렬한 응원
지난 3월 중순 <지구를 지켜라!> ‘VIP시사회’가 열리던 한 극장에는 유난히 열광적인 분위기의 한 무리가 눈길을 끌었다. 광란이라 할 만큼 뜨거운 반응을 보냈던 이들의 정체는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봉준호, 류승완 등 젊은 감독들. 이날 그들은 <지구를 지켜라!>의 기발한 세계에 취했고, 이어진 자리에서도 술과 대화에 취했다. 그중에도 유난히 목소리를 높였던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한 카페에서 만나 <지구를 지켜라!>에 관한 수다를 떨었다. 4월12일이면 <마루치 아라치>(가제)의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류 감독과 5월 초 <올드 보이> 촬영에 돌입하는 박 감독 모두 초 단위로 일정을 짜야할 정도인데도 시간을 내준 것. ‘동업자’로서의 연대의식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서였다.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예전 영화광 시절의 즐거움을 잠시나마 되찾았던 두 감독이 “이 영화를 응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찬욱 | (웃으면서)어 승완아, 소문에 <마루치 아라치>의 크랭크인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더라.
류승완 | 감독님, 제발 악소문 좀 내지 마세요. 아, <올드 보이>는 감독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박찬욱 | (웃음) 도대체 개봉이 언제야, 개봉이?
류승완 | 아직 개봉을 안 잡고 있어요, 일부러. CG 분량도 많고 스케일도 커서 개봉일을 미리 정해놓을 수가 없어요.
박찬욱 | 난 11월이거든. 알지?
류승완 | 아, 전 11월엔 죽었다 깨도 못해요. 저희는 8월 말 정도까지 촬영하는데 후반작업이 길어질 것 같아요.
박찬욱 | 후반작업 들어가면서 다음 작품 촬영에 들어가면 되겠네.
류승완 | 원하는 게 그건데. ‘류승완이 해냈다’,(웃음) 이런 좋은 소문을 내놓고 작품이 끝나기 전에 계약을 해서…. 계약만 하면 전쟁이 나도 되고….
박찬욱 | 전쟁, 그거 어떡하니?
류승완 | 아차, 감독님. 00당에 제 연락처 가르쳐주셨어요?
박찬욱 | 아니. (침묵)
류승완 | 거기서 감독님이 가르쳐줬다고 하던데요. 제가 촬영준비 때문에 낮엔 시간이 정말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 1인시위를 하라더군요.
박찬욱 | 거 참 이상한 애들이네. 내가 네 전화번호 가르쳐줬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류승완 | 아, 그렇죠. <지구를 지켜라!> 어떻게 보셨나요?
박찬욱 | 이창동 감독이 문화부 장관이 되는 걸 보고, 이젠 나도 영화 만들어 칭찬도 많이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당분간 영화 못 만드실 테니. 그런데 이런 영화가 나오고…. (한숨) 앞으로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도 나오지…. 올해도 틀렸구나…. (웃음) 그런 착잡한 마음이지. 산 넘어 산이구나, 하는. 허진호가 나보다 늦게 찍을 것 같아서 그나마 위안은 되는데, 어떡하냐 이제.
류승완 | (애써 정색하며) <선생 김봉두>가 잘돼야죠.(류승완 감독은 <선생 김봉두>의 제작사인 좋은영화에서 새 작품을 만든다) 저는 그거예요. (웃음)
박찬욱 | 좀 진지해지자. 나는 장르영화가 볼 때는 즐겁지만, 만들 땐 안 내키는 그런 갈등 속에서 지냈어. 내가 만든 영화가 완전히 장르에서 벗어난 게 아니면서도, 만들 때는 장르적으로 막 간다는 게 별 재미가 없어서 괴로워하던 참이라고. 근데 이 영화는 장르영화이면서도 장르를 갖고 놀다시피 하니까 그런 게 부럽기도 하고. 그런 감독이 한국에 필요한데, 기다리던 재능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이게 <선생 김봉두>에 비해 어떻다는 거야.
류승완 | 일단 <선생 김봉두>의 흥행이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웃음) 사실 저는 <선생 김봉두>를 재밌게 봤거든요. 영화의 완성도나 이런 걸 떠나서 만든 사람의 진심이 보여서 좋았어요. 같은 맥락에서 <지구를 지켜라!> 같은 경우는 주류에서 장르를 활용해 어떻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가, 이게 너무 잘 보이니까. 감독 개인의 얘기이기도 하고, 장르의 외피를 썼으면서 그거대로 가지 않기도 하고.
박찬욱 | 우리 제작실장은 팀 버튼보다 나은 재능이라고 그러던데. 팀 버튼이 없었다면 또 이런 영화도 안 나왔겠지만.
류승완 | 저는 장준환 감독 단편도 봤고, 함께 일해봤던 경험이 있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시나리오도 먼저 봤거든요. 그래선지 영화에서 만든 사람이 계속 보이더라구요. 그게 되게 좋았어요. 물론 개인을 모르고 그냥 영화를 봤을 때야 다르겠지만, ‘현장에서 저 사람 어디서 낄낄댔겠군’,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알겠군’, ‘저때 정말 자기가 무서워했겠군’, 뭐 이런 식이니까 재밌더라구요.
박찬욱 | 난 잘 모르는데도 재밌었어.
류승완 | 요샌 그렇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해도 뭔가 이렇게 덮게 되고….
박찬욱 | 장 감독은 잘 모르지만 난 (신)하균이를 보는 게 좋았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함께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 때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 거기서 말을 못하는 역할이었으니까. 자기 표현의 무기를 뺏어놓고 연기시키는 게 미안했는데, 여기서 적역을 맡아 날아다니는 걸 봤거든. 하여간 시사회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장준환, 허진호 감독, 뭐 이렇게 새벽 6시까지 술 마셨다니까. 근데 하균이는 중간에 도망가고. 그래서 하균이한테 문자 메시지 보냈어. 두나한테도 보내고.
류승완 | 아 감독님, 요즘에 문자도 보내세요?
박찬욱 | 그럼. ‘하균이 영화 끝내주더라’ 이렇게 보냈더니, 두나는 그때 촬영 중이더라구. 새벽 6시에. 근데 어떻게 걔는 금방 알더라. ‘아직도 술 드시나요’ 하고 답이 오더군. 문자에도 그런 게 보이냐? 혀 꼬부라지고 그런 게? 아, 내가 6시에 일어나서 뭘 했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하는 거지, 그지? (웃음)
류승완 | 새벽 6시에 문자는 잘 안 보내죠. (웃음)
박찬욱 | 특기할 만한 사항은 송강호 선수가 이 영화를 두번 봤다는 거야. 1년에 2편 보는 사람이. 올해 분량 다 채운 거야. (폭소)
류승완 | 이 영화에서 B급영화 정서가 흐른다는 말이 많은데, 제가 볼 때 장준환 감독은 참 특이해요. 감독 본인은 B급영화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쩌다 저랑 영화 얘기를 하다보면, 놀랍다는 눈을 하면서 그 느릿느릿한 말투로 ‘어 넌 어떻게 그 영화들을 다 봤니?’ 이런다고요. (웃음) 아무튼 그 영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가 그런 건데, 뭔가 아슬아슬한 지점이 있잖아요. 어느 쪽으로 좍 가는 게 아니라, 위태위태하게…. 그게 영화의 긴장이 돼서 몰아붙여요. 연기도 마찬가지에요. 이 사람이 영화광 출신이고, 그런 장르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설렁설렁한 연기에 중독돼 있었더라면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연기 연출하는 방식은 정공법이잖아요.
박찬욱 | 난 옛날 존 벨루시 시절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가 떠오르더라. 그때 이 TV쇼에 나오던 코미디언들은 다 마약중독자였단 말야. 그 미치광이, 마약중독자들이 나와서 미쳐버린다고. 이 영화엔 그런 무드가 있었어. 아주 좋았어. 그렇게 광기에 휩싸이는 영화가 한국에 별로 없었잖아.
류승완 | 저는 장 감독이 감수성에서 영향받은 지점이라면 B급영화로부터가 아니라 B급인생이 아닐까, 생각해요. 거기 나오는 폭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지운 감독님이 옛날에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고 나서 제 영화에 나오는 폭력이 되게 히스테리컬하다는 느낌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에 나오는 폭력도 여유가 없고, 광적이고….
박찬욱 | 너무 잔인하더라. 뒷부분에 연구소에서 백윤식씨가 하균이를 X나게 팰 때, 너무 무섭더라.
류승완 | 최근에 비교할 만한 영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물속에서 발목 끊고, 그러는. (<복수는 나의 것>을 극히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찬욱 |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더라.
류승완 | 그게 제 생각에는 약자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 같아요. 강자라면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게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거든요. 여기서 약자란 개인이 약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입장이나 그런 게 그런 편이란 거죠. 그리고 단편 <2001 이매진>하고 같은 연장선상에서 약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것도 느껴지거든요. 엄마에 대한 집착이나. 기본적으로 홀로서기가 잘 안 되는 인간에 대한 애정 같은 게 있어요.
박찬욱 | 그 인간이 그래?
류승완 |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박찬욱 | 너 삭제장면 아냐? 하균이가 굉장히 아쉬워하는 삭제장면이 있더라구. 추 형사를 추락사시키는 장면 있잖아. 그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가 빨랫줄에 널려 있는 마네킹 팔들을 죽 트래킹한대. 그런데 그 팔들이 흔들흔들하는 거야. 그리고 저 멀리서 하균이가 도끼질을 하고 있는 게 포커스아웃으로 비쳐지고. 그러니까 도끼질 진동에 흔들거리는 거야.
류승완 | 카아~.
박찬욱 | 아주 리드미컬하게. 그리고 트래킹의 마지막은 진짜 팔이지. 추 형사의 팔. 그게 참 좋았다더라구. 차승재 대표도 아주 잘 찍은 장면이었다 하고. 감독이 왔기에 그걸 왜 뺐냐구 그랬어. 너무 폭력적이어서 뺐다고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거다, 지금 남아 있는 데서도 훨씬 폭력적인 장면이 많다고. (웃음)
류승완 | 감독님, 근데 삭제장면이 걸작이란 얘기는…. 우리가 항상 쓰는 수법이잖아요. 정말 죽이는 장면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박찬욱 | 장준환 감독이 그 장면에 대해서 뭐라고 하냐면, “참 아름다운 커트였죠”. (웃음)
류승완 | 저는 <지구를 지켜라!>가 걸작이라기보다는 간만에 보는 에너지가 충만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다소 거친 CG장면들이 튀어나와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잖아요. 그 영화의 미덕이 거기인 것 같아요. 너무 세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너무 세서 좋은….
박찬욱 | 난 좋아. 형사들 나오는 게 좀 재미없었고, 나머지는 더 바랄 게 없어. 팀 버튼이 쓴 시나리오를 존 랜디스가 연출한 것 같아.
류승완 | 크으~.
박찬욱 | 특히 생각나는 장면이, 백윤식씨가 여자 옷 입고 환풍기 뜯고 도망가려다가 감전돼가지고…. (폭소) 엎어져서 울다가 웃다가 막 그러잖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송강호도 그러더라고. “저건 연기가 아니다. 실제로 백윤식씨가 ‘씨발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나. 내 인생 왜 이렇게 풀렸나’, 이러는 거”라고. (폭소) 난 거기가 백미였던 것 같아.
류승완 | 제가 꼽는 백미는 액션장면이죠. 약국에서 나와서 벌어지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장면이지만. (웃음)
박찬욱 | 내가 아쉬웠던 건 형사들 에피소드가 너무 길게 느껴지더라는 거야. 영화를 보다가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이제 산으로 가죠,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류승완 | 병구나 강 사장, 순이는 안에서 뭔가 분열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형사들은 딱 자기 역할만 있는 것 같아요. 서울대 나온 형사, 막 치고 올라가는 반장, 주방에서 일하는 추 형사 이렇게. 그러니까 역할만 있지, 캐릭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박찬욱 | 난 형사들보다는 순이를 좀더 보여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좀더 보고 싶더라. 병구와 헤어진 다음에 순이가 어떡하고 있는지, 순이가 서커스하는 장면이나 왜 순이는 병구와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아, 그런데 나는 백윤식씨가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너무 웃겨가지고…. (웃음) 그 아무 포인트가 아닌데도…. 대사가 없어도 돼. 아으으, 그러기만 해도 죽겠더라, 진짜.
류승완 | 배우도 배우지만, <지구를 지켜라!>에서 굉장히 좋았던 게 미술인 것 같아요. 그분이 우리 영화 미술감독(장근영)이기도 하죠. 음악도 굉장히 좋았어요. <오버 더 레인보우>를 계속 변주해서 쓰는 것도.
박찬욱 | 난 <오버 더 레인보우> 쓴 것은 좀 진부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어.
류승완 | 미술감독에게 들어보니 같이 콘티 작업을 했는데, 밝은 장면에서는 밝은 <오버 더 레인보우>, 어두운 장면에선 어두운 <오버 더 레인보우>, 빠른 장면에선 시끄러운 <오버 더 레인보우>, 이렇게 종류별로 틀어놓고 콘티를 그렸대요. 다른 인터뷰에선가 봤는데, ‘<오버 더 레인보우>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니냐’고 물으니까 장준환 감독이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대요. <오즈의 마법사>를 자세히 보고 있으면 주디 갤런드가 미쳐서 그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웃음)
박찬욱 | 그러니까 미친 병구와 잘 맞는다? 그래, 너무 잘 맞아서 재미없다는 얘기지. 그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 미쳤다고 볼 수도 있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도 이혜영, 전도연, 그리고 수십명 다 미쳤지.
류승완 |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게 정상적이진 않죠.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발목 끊고…. (웃음) 아, 감독님, <2001 이매진> 보셨나요? 이 영화가 그것과 되게 흡사해요. 캐릭터가 함몰되는 방식 같은 게. 주인공의 존재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언가에 영향받는다는 것도 그렇죠. <2001 이매진>에선 주인공이 존 레넌이라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아이콘에 필이 꽂히죠. 이 영화도 보면 거기서 농담같이 얘기하지만, 병구가 추 형사에게 “저도 이 책 안 만났으면 평생 화만 내고 살았을 거예요”라고 하잖아요. (웃음)
박찬욱 | (웃음) 그 대사 진짜 예술이야.
류승완 | 그렇죠? 어쨌든 병구가 완전히 산골에서 사니까 현대문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돌파구가 없으니까 그런 책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박찬욱 |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잖아. 대개 이런 영화에 그런 얘기가 들어갔을 때 거부감을 사기가 쉬운데 그런 건 전혀 없었어. 그런데 시사회에서 일부 젊은 관객은 병구의 과거가 나오자 ‘또 그런 거였어?’라고 했다는군.
류승완 | 실제로 제 동생 세대나 이렇게 보면 좀 다른 것 같아요. 아마도 내 또래 정도까지가 현실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박찬욱 | 그렇지. 요즘엔 시위를 해도 즐겁게 하니깐.
류승완 | 젊은 세대가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긴 하네요.
박찬욱 |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죽던데. 우리 회사 직원들도. 우리 회사 직원들은 <복수는 나의 것> 안 좋아하는 애들 많거든.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는 다 죽고 왔어. 결국 흥행이야 관객이 알아서 하는 거지만, 이 영화가 잘되면 우리야 편해지겠지. 이런 영화가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무래도 은퇴, 아니 퇴출 날짜를 좀 미룰 수 있겠지.
류승완 | 스코시즈가 <천국의 문> 사태가 끝나고 한 얘기 있잖아요. 더이상 큰 제작비로 개인적인 영화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뭐 이렇게. 저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은 영화가 일종의 기호식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박찬욱 | 이 영화에서 가장 기분 좋은 점은 웃음이 폭력과 붙어 있다는 거야. 그게 또 슬픔과 그렇게 결합돼가는 거 말이야.
류승완 | 일방적으로 웃어라 해서 웃는 게 아니라 좋은 거 같아요. 끊임없이 계속 웃을 사람 웃고, 놀랄 사람 놀라고. 무책임한 게 아니라 재밌는 연출 같아요. 이를테면 김지운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도 그런 게 있잖아요. 포크로 이마를 찔렀는데 웃어야 하는지 아닌지, 달려가다 아파트 문짝을 맞고 쓰러졌는데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박찬욱 | 내가 시나리오 쓰거나 콘티 작업할 때 사람들이 이건 너무 잔인해요, 라고 할 때 내가 항상 드는 예가 있어. <반칙왕>을 봐라. 거 뇌의 시점숏, 포크가 푹 들어오고. 근데 그거 흥행만 잘되지 않았냐. 그래서 나는 아직 멀었다고 그러지. <지구를 지켜라!>가 잘됐으면 하는 것도, <반칙왕>말고 예를 들 사례가 있으면 좋은 거지, 나는.
류승완 | 하긴, 이태리타월로 밀고 물파스를 바르니…. 우린 아직 멀었다.
박찬욱 | 백윤식씨가 “난 마취됐어, 아프지 않아”, 이러면서 못 박힌 손을 빼고. 오우~.
류승완 | 그러니까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하지만 영화로 즐길 수 있는,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영화적인 매력인 것 같아요. 너무 뻔하지 않게 가면서…. 그래서 상상력이라보다는 관점의 차이 같아요. 저는 이 영화가 상상력이 빛난다기보다는 아 참 골때리게 본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관점이 독특하다는. 말할 때 엄한 얘기 툭툭 던지는데 유쾌한 사람 있고, 짜증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장 감독이 전자 스타일이거든요. 영화가 그렇게 나와서 되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러면 웃기겠지, 식의 잔 계산 대신 그냥 딱 했는데 그게 웃겨 보이고. 즐겁고 슬프고.
박찬욱 | ‘이러면 웃기겠지’보다는 ‘이때 웃어도 할 수 없어’쪽이겠지.
류승완 | 관객이 포스터 문구를 보고 코미디 정도로 생각하고 본다면 ‘또 뭐야’, 이럴 수도 있는데, 그런 건 다 걷어버리고 극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냥 풀어놓고 보면 좋을 거예요. 분명 진심이 있는 영화잖아요.
박찬욱 | 근데 그날 차승재 대표의 반응은 실망스러웠어. 나하고 허진호하고 김지운, 류승완이 좋아했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그걸 비보로 받아들이더라고. 어쩌면 좋냐는 투로. 그런가 하면 최근에 김동주 대표 인터뷰에서는 곽경택하고 나하고 박기형하고 허진호 얘기를 하면서 최신작이 다 실패했던 감독들이라 반성하는 걸 기대한다고…. 한순간에 이렇게 되는구나…. (웃음) 잠깐이구나…. (웃음) 그렇게 생각했지.
류승완 | 그래도 감독님은 누가 얘기라도 해주죠. 저는 이제 얘기도 안 나와요. 영화나 찍어야지, 조용히.
박찬욱 | <지구를 지켜라!> 광고에 내 평도 실려 있잖아. 근데 그거 실패해봐. 투자자들이 날 또 어떻게 보겠냐고. 내 말을 인용해놓고 그때 가서 차승재 대표가 책임질 거냐고.
류승완 | 그러고보니 저도 이 대담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웃음) 아, <시카고>에 붙을걸.
박찬욱 | 아무튼 내 영화도 앞두고 있는데, <지구를 지켜라!> 보고선 X됐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류승완 | 저는 남의 게 좋으면 가져다 쓰는 성격이라서, 뭐 별로…. 그냥 전화 한통 해주고 가져다 쓰는 편이라 그런 게 없어요. (웃음) 그런데 희한한 게 제가 한 건 표절이라고 하고, 장준환 감독님이 한 건 표절이 아니라고 하대요. 아니,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똑같이 해놓고, 오마주다, 이러고.
박찬욱 | (웃음) 솔직히 말해서 그 영화 보고 행복했어. 너무 유쾌하게 보고 6시까지 술 마시고.
류승완 | 어쨌든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은 좋지 않아요?
박찬욱 | 모처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영화를 만난 거고.
류승완 | 저는 시나리오 볼 때부터 잘됐으면 좋겠고 막 그랬는데, 내가 응원한 만큼 나와서 안심했어요. 나 이 영화 좋았어, 그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게 되게 고맙더라고요.
박찬욱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너도 바쁘지? 그럼 영화 열심히 만들자고.
류승완 | 네, 감독님. 그럼 저희도 <지구를 지켜라!>를 능가하는 주류 대중 흥행영화를 만들어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