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있기에, 라는 단서뿐이겠는가. 알고 있더라도 물리적 방문이 힘겹기에 영상자료원이나 인디상영관에서의 개봉 소식은 별도로 고지하지 않았었다. 허나 우연한 계기를 통해 잠시 딴맘을 먹게되었다.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준 친구는, 필요에 따라 문자를 보낸다는 마셰티 양반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마셰티>를 극장에서 보기 몇달전나는 이 작품을 집에서 먼저 감상했었다. 최소한 개봉작만은 극장에서 만나보자는 이기적 순결주의자였지만 솔직한말로 장난으로 시작해 장난으로 끝나는, 심지어 아무런 맥락없이 잔인하기까지한 이 작품이 대한민국 극장에 걸리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아마 현 캐스트에서 몇몇 배우들의 이름을 지워버린다면 DVD 직행의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속단했었다. 하지만 극장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본 후 <마셰티>를 완성시키는 요소는 다름아닌 극장이란 공간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부담은 버리고 시작한 농담이었다. 엉성한 비율의 화면과 스크린에 애써 박어넣은 촌티들. 영화적 헛점을 극대화시키는 극장이란 공간이야 말로 요 쌈마이스런 로드리게즈의 농에 가장 적합한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룡정점은 나와 비슷한 각도에서 의도된 순간에 적절한 낄낄거림으로서 그들의 발악에 예를 갖추는 관객 친구들이었다 (생판 남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친구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래저래 <마셰티>에 대한 미안함과 로드리게즈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고 영상자료원에서 준비한 5월의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읽어봐도 주제와 근거가 전혀 이어지지 않고있지만 이번 <마셰티> 해프닝을 통해 깨우친 간단한 교훈은 첫째, 극장에서 멀쩡히 영화가 상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구석에서 소박하게나마 감상한 후 영화에 대해 제멋대로 실망하는 짓거리는 어쩌면 바로 옆동네에 사는 처자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멋진 시간을 보내볼 수 있음에도, 화상채팅을 통해 그녀와 한두시간 떠든 후 '이번 소개팅에서 만나본 여자는 영 별로였어...' 라고 중얼거리는 것 만큼 안쓰럽고 희안한 짓이나 광경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이런 진실되고 황홀한 스크린의 경험을 단 한번의 언질과도 마주하지 못해 갈등의 기회조차 맛보지 못할 극소수의 불우이웃을 돕기 위함이다.
고전은 개뿔, 어쩌면 10년 후면 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할 작품들도 섞여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이유는끝내주는 몇몇 걸작들도 섞여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걸작보다 소중하게 맘에 담아둘만한 이쁜 영화들이 꽤 많기에, 그리고 그런 인연과 어긋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걸어놓고 누군가는 인지하길 바라기 떄문이다. 5월 1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이 끝나면 <블루레이 특별전>과 <앵콜극장전>이 이어진다.
블루레이 특별전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5월 3일부터 7일까지 비교적 짧게 진행되며 각 영화당 상영횟수는 2회 정도다. 상영일자와 시간은 이곳 상영스케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의 미로
2006 / 15세관람가
기예르모 델 토로
그라인드 하우스
2007 / 18세관람가
쿠엔틴 타란티노 - 로버트 로드리게즈
허트 로커
2008 / 15세관람가
캐서린 비글로우
렛 미 인
2008 / 15세관람가
토마스 알프레드슨
싱글맨
2009 / 15세관람가
톰 포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2010 / 12세관람가
이시아라 타츠야 - 타케모토 야스히로
일단 5년전 일반 상영관에서 기립박수를 칠뻔한 <판의 미로>를 감상할 수 있다. 스크린으로 다시볼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번 라인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그라인드 하우스>다. 북미흥행 실패로 타국에선 매정하게도 쌍둥이를 각기 다른 곳으로 입양시키는 꼴이 되버렸던 웨인스타인의 횡포로 (그도 그럴것이 <그라인드 하우스>는 지난 10년간 최악의 흥행성적을 거둔 작품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 인해 흥겨운 이벤트의 쾌감의 반의 반도 느끼지 못했던 지난날의 원통함을 씻어내릴 기회다. 상영시간 191분이 이리도 반가울 수 있을까.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두 감독의 작품을 합치고 중간에 일라이 로스, 에드가 라이트, 롭 좀비가 별 지랄을 다해놨어도 <카페 느와르> 보다 러닝타임이 짧다. <플래닛 테러>와 <데스 프루프>를 동시에, 그것도 스크린으로 접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주 씬나죽겠다. DVD 로 몇번이고 돌려본 작품이지만 기껏해야 안방 티비로 감상한게 전부이기에 이번 기회야말로 <그라인드 하우스>와의 진정한 첫만남이 이뤄질 수 있을것 같다.
블루레이 특별전에 이어 우릴 맞이하는 건 <앵콜극장전>이다. 누가 한건진 몰라도 참 이쁜 짓이다. 본 프로그램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로큰롤 인생
2007 / 35mm / 전체관람가
스티븐 워커
우리 의사 선생님
2007 / 35mm / 12세관람가
니시카와 미와
몽골
2007 / DV / 15세관람가
세르게이 보드로브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
2008 / 디지털/ 전체관람가
파울 슈마츠니 - 마리아 슈토트마여
오슬로의 이상한 밤
2008 / 35mm / 15세관람가
밴트 해머
산타렐라 패밀리
2008 / 35mm / 15세관람가
나초 G. 베일라
파리 36의 기적
2008 / 35mm / 15세관람가
크리스토퍼 빠라띠에
울트라 미라클 러브 스토리
2009 / 디지털 / 12세관람가
요코하마 사토코
아이 엠 러브
2009 / 35mm / 18세관람가
루카 구아다그니노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
2010 / 디지털 / 12세관람가
피나 바우쉬
환상의 그대
2010 / 35mm / 18세관람가
우디 앨런
사랑하고 싶은 시간
2010 / 디지털 / 18세관람가
실비오 솔디니
세상의 모든 계절
2010 / 35mm / 12세관람가
마이크 리
솔직히 이 13편의 작품을 다 감상한건 아니지만, 일단 음악과 춤이 인생과 만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연출해내는 <로큰롤 인생>과 <엘 시스테마> <댄싱 드림즈>가 안보이나. 이따금씩 극장 관람을 상상해본 작품들이기에 심히 반갑다. 그뿐인가 때려죽여도 결코 변하지 않을 2011년 최고의 걸작 두편이 라인업에 끼여있다. 나는 사랑일세 라며 황홀한 자아회복귀를 펼쳐보인 평범한듯 비범한 <아이 엠 러브>와 인생의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배열해 사람 맘을 제멋대로 들쑤셔놓은 마이크 리 할배의 <세상의 모든 계절>을 다시볼 수 있다. <미드나잇 인 패리스>를 만나기 전에 잠시 보류했던 우디 앨런의 최근작도 만나볼 수 있고, 설원의 풍경만큼이나 시린 농으로 점철된 <오슬로의 이상한 밤>의 분위기에 빠져볼 수 도 있는 기회다. 5일 부터 19일까지 상영되며 자세한 상영일정은 이곳 상영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편중 10편 가량은 고대하고 있다. 물론 다 볼수는 없을게다. 애석하게도 잠실에서 바라본 영상자료원의 위치는 서울같지 않은 서울이다. 얼마전 비행기를 타고 갔던 제주도가 더 금방 도착했던것 같다. 여하튼 루카 구아다그니노, 마이크 리 평생을 기억하게 될 내생의 걸작을 선물해준 두 감독의 작품은 기필코 다시찾을 생각이다. 그리고 <그라인드 하우스>는 사적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누가 때려죽인다고 해도 가볼 생각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기회가 된다면야 최대한 노력해서 스크린을 통해 만나보고 싶다. 그러고보니 영상자료원에 대해 이야기를 안했다. 위치는 여기고, 가격은 공짜야. 시설은 준수하다네. 인사는 못하겠지만 함께 즐거이 영화를 감상해보자고. 마셰티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