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설명할 작품은 2006년작 <디스트릭티드-제한해제>중 3번째 단편인 마르코 브람빌라의 <Sync>야. 그리고 이 영화에는 담겨있지 않지만 작가의 연작품중 하나이자, <Sync>와 대응관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 <Sync watch>까지 소개하려고해. 우선 영화 <제한해제>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할게. 이 작품은 포르노그라피와 예술의 경계에 대해 자문하는 7인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그 관계에 대한 답을 탐구하는 과정이야. 난잡한 성교행위와 예술적 표현행위의 경계선을 묻는단 공통점 외에는 전혀 다른 느낌과 형식을 지닌 7편의 단편이 담겨있어. 기획의도에서 부터 예상되듯이 이 작품은 일반 성인영화의 수준을 넘어 포르노그라피 이상의 표현수위를 갖고 있으니깐 감상전에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거야.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되기에 텍스트로 설명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야. 가령 한 남자가 사막 한 가운데서 7분 가량 자위행위를 하다 결국엔 실패하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One cut으로 가감없이 보여주거나, 다큐멘터리 필름 형식으로 20대 청년과 포르노 여배우의 만남을 주선해 그들의 성교를 세세히 살펴 보는 식이야. 이 외에도 성기노출을 기본으로 전제한 도발적인 시도들이 많이 행해져. 이 시도는 빠른 속도로 일상에 스며들어오는 포르노를 어느 선에서 예술과 구분 지을 수 있냐는 물음이지.
우리사회만 봐도 포르노는 야동이란 친숙한 단어에 덮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버렸어. 방송을 위해 직업적으로 극을 쓰는 작가도, 거리에서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도 농담처럼 쉽사리 던져지는 소제가 되버렸어. 그만큼 일상과 가깝다는 걸꺼야.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그 근접성은 점점 늘어만가고 있어. 인터넷을 통해 물건 하나만 사도 포르노가 범람하는 웹하드의 무료 이용권이 딸려 오는 세상이야. 성인인증과 인터넷만 있다면 누구나 어디서든 포르노를 접할 수 있는, 예술 감상보단 포르노 감상에 더 많은 이들이 힘을 기울이는 세상. 여기선 그것이 옳다 그르다 논쟁 하는건 의미가 없을것 같아. 단지 우리의 현실이 포르노에 쉽사리 노출된 상태란게 핵심이야, 그리고 <제한해제>는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진지하게 예술과 포르노 사이에 오가는 수 많은 오해들을 생각해보자는 거야. 예술이나 외설이냐. 교감이냐 쾌락이냐. 이 곳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한해제>는 진지하게 고민거리를 던지는 거야 .
그 중 가장 눈에 띈 작품이 마르코 브람빌라가 연출한 <Sync>였어. 예전엔 헐리웃에서 <데몰리션 맨>이나 <트렁크 속의 연인들>과 같은 극영화도 연출했었는데, 이후로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는것 같아. <Sync>는 메인스트림 영화와 포르노그라피의 성교장면 수십, 수백개를 작은 단위로 잘라 조금씩 떼어 내고, 시간적 순차에 맞게 다시 그것을 재배열하는 작품이야. 서로 다른 영화와 포르노의 이미지들이 그럴싸한 배열에 맞춰 이어지며, 남여의 만남과 성교 그리고 헤어짐을 표현하고 있어. 1분 30초 가량의 작품인데, 1초에 4,5개 씬이 지나갈 정도로 엄청난 속도감을 지닌 작품이야. 영상의 속도를 따라잡는 쉴틈없는 드럼비트 까지 가해져서 예술의 도구와 쾌락의 도구가 한데 엉켜 정신없이 굴러가 버려.
이건 무슨 뜻일까. 아마도 가장 흔한 동시에 가장 민감하기도한 논제, 예술과 외설의 규정기준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영상언어로 에둘러 표현한것 같아. 예술 분야, 특히 영화에 있어 자주 논란이 되곤 하잖아. 표현수위를 운운하며 멀쩡한 영화를 순식간에 포르노로 전락시키는 규제말야. 난 이 작품을 보면서 그 사안에 대해 충분히 설득력있는 답이 되는 영상이라 생각했어. 성행위를 다룬 모든 영상물은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버리면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질문은 우문이 되어버리잖아, 그러니 성교와 육체적 표현행위를 단순 독립 씬으로 분류해 규정하는 우를 범하지 말란 조언이 아닐까 싶어. 물론 장르적으로 포르노그라피 수준, 혹은 그를 뛰어넘는 악취미가 전시되는 예외도 있어, 나 역시 그런 작품들을 예술의 포용성으로 안아주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런 장르적 특성을 벗어난 통상의 예술에 있어선 분명한 맥락-감정적 표현 도구 혹은 명확한 주제전달을 위한 도구로 이를 사용하기에, 큰 그림 아래서 진심을 다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면 소라 아오이와 존 카메론 미첼의 차이는 누구나 알 수 있는것 아닐까. 앞서 이야기 한것 처럼 예술의 범위가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경우가 있어. 극단적 특이 성취향이 극의 흐름과 인물의 표현 상 개입될때는 조금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거야. 몇몇 예술가를 제하면 지금까지 내가 봐온 예술가들의 표현수위는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것 같아. 존 워터스나 파졸리니의 문제작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건 어려운 문제가 되겠지만, 맥락과 감정 그리고 주제적 측면에서 편견없는 접근을 한다면 그것이 가치없는 외설이 되든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되든, 결과와 상관없이 그런 접근 태도 자체가 중요하다 생각해.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걸까? 나에게 너무나 깊은 위로와 따듯한 치유를 안겨줬던 <숏버스>가 포르노 취급 받던 현실이 떠올라서 이야기 해본거야.
같이 소개할 <sync watch>는 이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기에 올려봤어. 메시지보단 흥미로움에 이끌렸어. 전시장의 구도를 보니 이 작품들은 설치미술의 형태로서 스크린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더라고. 아마도 제목에서 추측하건데 <sync>의 감상자들을 비슷한 템포로 편집해서 일괄하는것 같아. 흥미로우니 한번 봐바. 각종 유명 영화의 장면들이 셀 수 없이 쏟아지니깐 말야. 아마 몇몇 작품은 눈에 익을거야. 너무 빨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래의 <sync>이미지는 동영상이 아니고 스크린샷이야. 개인적으로 두 작품 모두 가지고 있어서 업로드 하려다가 <sync>를 업로드한 다른 네티즌들의 영상들이 'sexual content'를 포함하고 있단 사유로 삭제되길래. 나 역시 따로 업로드는 안했고, 아래에 <sync watch>만 올려봤어. <sync>는 외국 블로거가 올려놓은 영상이 있어서 링크는 걸어놓을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봐바.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제한해제>는 굉장히 높은 수위의 작품이란걸 생각하고 보도록해. 그나마 가장 양호한 작품이 <sync>이고 1초에 4,5개의 씬이 쏟아지지만 간혹 성기노출도 되니 볼 사람만 봐바. 그래도 이걸 보며 야하단 생각은 잘 안들거야. 만약 이게 성인물로 보인다면 굉장히 집중력이 좋은 사람일거야.